[일사일언] 페이스메이커가 쓰러진다면…

나연만·소설가 2024. 11. 13.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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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춘천마라톤 당시 페이스메이커들이 각자의 풍선을 들고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 /이태경 기자

바야흐로 마라톤 시즌이다. 지난달 열린 춘천마라톤을 비롯해 크고 작은 대회가 이듬해 3월 말까지 이어진다. 이를 앞두고 많은 마라토너가 짧게는 석 달, 길게는 일 년간 길 위를 달리며 몸을 만든다.

얼마 전 한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목표는 서브 4. 즉, 4시간 안에 42.195㎞를 완주하는 것이었다. 출발선에 서니 수만 명의 참가자와 응원단들의 함성이 온몸의 세포들을 일깨운다. 이 기운을 받아 최고 기록을 달성할 것만 같다.

하지만 30㎞ 지점을 지나는 순간 모든 환경이 바뀐다. 체내에 축적된 글리코겐은 고갈되고 각목처럼 굳은 다리는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머릿속의 기록 달성을 향한 의지는 휘발되고 ‘내가 대회 등록을 왜 했나’ 하는 후회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30㎞ 이후부터는 오로지 정신력과의 싸움이다.

“32㎞ 지났습니다.” 가이드 러너가 자신의 손에 쥔 끈에 의지해 뛰고 있는 시각장애인 선수에게 현재 거리를 알려주며 나를 지나쳐 갔다. 나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저 앞에는 완주 시간이 인쇄된 풍선을 매달고 뛰는 페이스메이커가 보인다. 그가 점점 나와 가까워진다. 이상하다. 내가 킵초게도 아니고, 그가 내 페이스에 맞춰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멈춰 서 걷고 만다. 그를 앞서는 순간 그의 지친 얼굴이 잔상처럼 이어졌다. 그도 사람이었다. 뒤를 다시 돌아보니 그가 다시 달리고 있었다.

대회가 끝난 후, 마라톤 페이스메이커에 대해 검색해 봤다. 너무 괴로워 자기가 매단 풍선을 터뜨리고 싶었다는 한 후기가 눈에 들어온다. 나 같은 일반 주자야 중도에 포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한다. 그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위해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 시각장애인과 같이 뛰는 가이드 러너들은 또 어떤가. 기록을 달성하지도, 주목받지도 못하지만, 오로지 다른 주자들을 위해 달리는 것이다.

어떤 성공 뒤엔 항상 타인을 돕는 이들이 있었다. 페이스메이커 없는 마라토너, 캐디 없는 골퍼, 조수 없는 과학자, 번역가 없는 비영어권 작가가 금메달이나 노벨상을 타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주목받지 못해도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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