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스카’로 전락한 대학 도서관
대학생 시절, 서울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보존 서고에 있던 1900년대 잡지 수백 권을 사정 없이 찢어 폐기물 봉투에 던지면서, ‘기록 파괴에 가담 중이구나’ 생각했다. 대학에서 이렇게 폐기된 도서가 지난 5년간 900만권에 이른다는 기사를 최근 썼다. 취재 중 만난 한 대학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카페나 독서실처럼 공부하는 공간을 원하지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나는 도서관은 싫어한다.” 책이 쫓겨난 도서관 서가 자리에 ‘크리에이티브 라운지’ 같은 화려한 공간이 들어선다.
대학생들은 이런 쾌적한 공간에서 법학·의학전문대학원, 공인회계사, 변리사 같은 공부에 매진한다. 일타 강사의 강의 노트 등 수십 권의 참고서를 탑처럼 쌓아두기도 한다. 물론 대학 도서관에서도 동네 독서실처럼 전문직·자격증 공부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학 도서관의 주 기능은 연구 자료 제공과 후세를 위한 문헌 보존이다. 학생들에게 ‘쾌적한 독서실’을 만들어주겠다며 장서를 폐기하는 현상은 대학 도서관의 본분을 해치고 ‘스터디 카페’로 격하시키는 것이라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일부 대학에선 “디지털 시대에 굳이 무겁고 자리만 차지하는 종이 책을 소장할 필요가 없다”며 수십만 권의 책을 버리고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종이책을 마구잡이로 버리는 건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디지털 메모리의 내구성은 종이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급속한 사회 변화나 천재지변·전쟁 등으로 후세가 디지털 메모리를 해독하지 못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지금도 20~30년 전 플로피 디스크나 CD-ROM은 장치가 없어서 해독하기 어렵고, USB 메모리도 수년만 방치되면 데이터 오류가 발생한다.
일선 교수와 연구자들의 불편도 상당하다. 한 사학과 교수는 “불과 수십 년 전 잡지를 보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1990년대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잡지들이 무더기로 폐기돼 현대사 연구자들이 자료 수집에 애를 먹는다고 한다. 대학 도서관이 카페로 변모하는 동안 연구자들은 ‘집 나간 책’들을 찾겠다며 전국 방방곡곡의 고서적상·헌책방을 헤맨다.
도서관 장서량은 평가의 한 지표다. 미 하버드대가 2000만권으로 세계 1위고, 영미권엔 1000만권 넘는 대학이 수두룩하다. 반면 한국은 540만권을 소장한 서울대가 1위다. 일본 도쿄대(900만권), 중국 베이징대(800만권)의 절반 수준이다. 한 인문대 교수는 “장서 대량 폐기, 도서관의 입시 독서실화(化)는 한국 대학 학부가 ‘로스쿨·의전원 예비 과정’으로 전락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1963년 서울대 ‘도서관보’ 창간사에 “대학 도서관은 대학의 심장”이란 말이 있다. 그 심장 박동이 지금 잦아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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