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도시와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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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였다.
몇 그루의 벚나무 사이에 황금빛 열매를 단 그건 분명 감나무였다.
내가 알고 있는 도시의 가장 멋진 감나무이다.
삭막한 도시에서 내 정서적 시장기를 해소해 줄 감나무 두 그루를 가진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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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였다. 몇 그루의 벚나무 사이에 황금빛 열매를 단 그건 분명 감나무였다. 평소 자동차로 휙 달리는 아파트 정문에 이런 감나무가 있었다니…. 그동안 왜 못 보고 지나갔을까? 봄에는 화려한 연분홍 벚나무에 가려 감꽃을 놓치고, 여름에는 그들의 무성한 잎에 가려 구별이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이렇듯 황금빛 노을이 타고 있는 열매를 왜 놓쳤을까? 몇 해 동안 열매 맺지 못하고 이제야 열매 맺은 걸까? 이 감나무는 어디서 왔을까? 언제부터 이 도시에 의연하게 서 있었을까?
감은 어린 시절 추억과 함께 온다. 자연이 놀잇감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에는 감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고 풋감을 주워 소금물에 담가 삭혀 먹었다. 많은 집들이 마당에 감나무가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감나무가 없었다. 먼 밭에 있는 감나무에 감꽃이 피기 시작하면 눈 뜨자마자 밭으로 내달렸다. 긴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 벽에 걸어 두고 꽃이 마를 때까지 지켜보았다. 감 몇 개를 발견하는 날은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뻤다. 큰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감꽃도 감도 많이 떨어지기를 바랐다. 감 삭히는 단지를 몇 번이나 열어보고 감이 익기를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바사삭 입술 말리며 혼자 놀던 그 아이/떨어진 감꽃 주워 하나하나 실에 꿴다/마당에 뒹구는 마음 엮어 꾸민 꽃목걸이/엄마는 오지 않고 굽은 등 내준 나무/기다리다, 기다리다 무뎌지는 시간들/덩달아 감꽃 진 자리 열매 맺는 해거름’(정애경의 시조 ‘둘째-감나무’ 전문)
마을이 도시로 바뀌고 감나무들도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고 감을 줍던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제 나는 가을이 익었음을 과일가게에서 만난다. 단감이 나오고 홍시가 진열대에 놓이면 나의 가을도 감빛으로 익는다.
감은 단감으로 반시로, 대봉감 둥시감으로 그리고 홍시와 곶감과 감말랭이로, 감식초와 감와인으로 다양한 모습과 이름으로 우리에게 온다. 과일 중에 이렇듯 많은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다양한 이름만큼 다양한 연령층에게 사랑받는 감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정서와 함께한 과일이다.
그리고 그 감을 품은 감나무는 어떠한가. 화려한 열매를 달고 있는 감나무의 잎은 단풍이 매우 곱게 든다. 대부분 감을 수확할 때까지 초록 잎을 간직하고 있다가 감을 다 보낸 뒤 물들기 시작한다. 자식에게 끝까지 영양분을 주려는 우리네 엄마처럼 잎은 가을의 가장 깊숙한 자리에서 곱게 물든다.
이맘때쯤 나는 안락동 충렬사에 있는 감나무를 보러 간다. 내가 알고 있는 도시의 가장 멋진 감나무이다. 누구는 토종감이라 하고 누구는 고종감이라 한다. 고욤보다는 크고 일반 감보다는 작은 밤만 한 감이 열리는 나무이다.
많이 거두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종류의 감나무인지는 알 길 없으나 나는 이 감나무가 멋있다.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새까만 가지에 감들은 달려 있어 마치 촛대에 불이 켜진 듯하다. 그 누구도 따지 않아서 가지에서 익고, 끝까지 버티고 있다가, 더러는 얼어버리고 더러는 물러 떨어지고 더러는 까치밥이 되는 감나무이다. 튼실한 감을 가진 감나무는 아니지만, 그 누구도 탐내는 감나무는 아니지만, 나는 그 감나무가 충렬사에 있는 우람한 모과나무보다, 그리고 잘 다듬어진 소나무와 배롱나무보다 더 미덥다. 그 감나무에서 나는 충렬사에 모셔진 무명용사와 의병을 읽는다. 깜깜한 밤에도 횃불을 켜고 그곳을 의연히 지키고 있는 감나무, 그들은 오늘도 나라를 굽어보고 있으리라. 그래서 가을이 되면 충렬사 감나무의 안부가 궁금하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날리고/한 톨 감 외로이 타는 한국 천년의 시장기여/세월도 팔짱을 끼고 정으로나 가는 거다’(정완영의 시조 ‘감’ 부분)
정완영 시조시인은 감은 태양의 권속이 아니라 달빛과 꿈으로 익는 한국 천년의 시장기라고 했다. 삭막한 도시에서 내 정서적 시장기를 해소해 줄 감나무 두 그루를 가진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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