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학교 설립이 지방 활성화 대책?…"몰이해서 나온 졸속 정책"
과학영재학교(영재학교)가 '지방 활성화' 대책으로 꼽히며 울산, 충북 오송 등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전국에 영재학교는 8개 있다. 영재교육 전문가들은 영재학교는 전국 단위로 학생을 모집하고 있어 지방 활성화에 크게 도움되지 않으며 오히려 고입 경쟁을 심화해 사교육비 부담을 키울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12일 관계기관에 따르면 충북도는 충북 오송에 2027년 설립 계획 중인 ‘AI 바이오 영재학교’의 설계비를 확보했다며 설계 공모를 시작으로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11일 밝혔다. 충북도와 이 지역 국회의원들은 충북 지역에 명문고를 설립해 지역 활성화를 하겠다는 목적으로 영재학교 설립을 추진해왔다.
9월에는 울산과학기술원(UNIST) 부설 영재학교 설립이 가능한 ‘UNIST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법률안을 발의한 김기현 의원은 당시 “UNIST법의 통과로 울산의 미래과학기술리더를 양성함으로써 대한민국과 울산 발전에 이바지할 토대를 마련하게 돼 기쁘다”라고 말했다.
이밖에 광주 '광주과학기술원(GIST) 부설 AI 영재학교', 충남 ‘KAIST 부설 칩앤모빌리티 영재학교’, 대구경북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부설 영재학교’ 설립도 지방 활성화 대책으로 정치권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문제는 영재학교의 지방 설립과 지역의 교육 수준, 인재 유입, 지방 활성화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영재학교는 전국에 있는 학생을 대상으로 모집하고 있다. 지역 인재 선발은 극히 일부다. 영재학교를 지방에 만든다고 영재학교에 입학하는 지방 학생이 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영재학교 입학생 대다수는 수도권 출신이다. 강경숙 조국혁신당 의원실과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지난달 발표한 전국 영재학교의 최근 3년 간 합격자 출신 조사 결과 10명 중 7명이 수도권(서울·경기·인천) 중학교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지방 활성화를 위해 영재학교 설립이 자꾸만 언급되는 이유에 대해 영재교육 전문가들은 "정치권에서 영재학교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영재교육 전문가인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는 "2003년 고도 영재를 입시 걱정 없이 공부하고 이공계 인재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영재학교가 처음 만들어졌다"면서 영재학교는 전국 단위의 영재를 길러내는 특수성을 갖고 있음에도 일각에서 단순히 '명문고'라고만 인식한다고 설명했다.
전국 2380개 고등학교 중 과학고는 20개, 영재학교는 8개다. 광주과고·경기과고·대구과고·대전과고·서울과고·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세과영)·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인과영)·한국과학예술영재학교(한과영) 등이 영재학교다. 이름에 '과고'가 들어가 있지만 과학고와는 차별점이 많다. 영재학교는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재편할 수 있다. 심지어 과학고는 시·도 광역단위로 학생모집을 진행한다.
정치권에서 이같은 차이점을 크게 인지하지 않고 영재학교가 명문고라고만 여겨 일단 설립하면 지역 교육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영재학교가 많아지면 영재학교 존재의 의미가 퇴색되고 학부모의 사교육비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송 교수는 "영재학교는 처음에 1개였지만 지역에서 설립을 원하며 점점 늘어 오늘날 8개로 많아졌다"며 "그러면서 영재학교가 소수 영재를 길러내는 설립 취지와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교육현장에서 영재학교는 설립 취지를 벗어나 의대와 명문대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계속 나오고 있다. 한 영재학교 교사는 "다른 일반고와 마찬가지로 많은 영재학교도 이른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내신 성적 따기 경쟁이 과열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한국대표단 단장을 맡은 최수영 아주대 수학과 교수는 "사교육 시장은 대입도 있지만 고입 대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서 "영재학교가 늘어나면 영재학교에 들어가려는 학생이 늘어나고 고입 대비 사교육 시장이 커지며 학부모의 사교육비는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무작정 영재학교를 만들기보다는 현재 영재원이나 영재학교에 투자를 늘리거나 영재교육 방향을 수정하는 등 기존 영재교육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이공계 인재 양성에 도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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