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내 머리 속의 트라우마
어린 시절 추락이 가져온 공포감 처럼
국민은 8년 전 탄핵, 트라우마로 남아
“아직도 절반” 말하지만 ‘촛불’ 들지 못해
대통령, 후반전 ‘선방’해 파국은 막아야
여섯 살 되던 해였다. 계절은 명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얇은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하니 늦봄이나 초여름쯤이었을까. 그 건물의 주인이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미국에 살며 잠시 한국에 온 또래의 친구를 만난 게 화근이었다. 친구를 따라 2층을 지나 철제 계단을 오르고 드디어 옥상에 도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밴드 다섯손가락의 명곡 ‘이층에서 본 거리’ 가사는 진짜 2층에서 내려다 본 풍경을 그대로 메모한 게 아닌가 싶다. ‘길거리 약국에서 담배를 팔 듯/ 세상은 평화롭게 갈 길을 가고/ 분주히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온종일 구경하는 아이도 있고’
하지만 나의 구경은 오래가지 못했다. 평생 처음 내려다 본 동네 풍경에 너무 빠졌던 것인지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옥상의 난간이 너무 낮았던 탓인지. 그렇게 나는 추락했다.
한나절 혹은 하루를 온전히(가족들의 기억도 엇갈린다) 기절해 있다가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부모님과 함께 동네분들이 모여 있다 환호했던 장면은 선명하다.
며칠 후에 들은 얘기로는 여섯 살 아이가 큰 상처 없이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옥상에서 바닥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1층 높이의 간판에 걸렸다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후에도 한참 동안 아이를 만나면 “천운이다”거나 “장수할 팔자”라고 했다.
운이 좋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트라우마까지 피해가지는 못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기분’은 어린 시절 공포 그 자체였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오래된 상처처럼 남아 있다.
필자의 경험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트라우마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겪고 있는 공통의 트라우마가 하나 있다.
2016년 겨울 광화문에 모인 수백만의 ‘촛불’로 시작돼 이듬해 봄, 이정미 헌법 재판관의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로 막을 내린 헌정 사상 처음이었던 대통령 탄핵.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을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려야만 했던 아프고 또 아픈 기억이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법이지만 정권의 시간 만큼은 “아직도 절반이나”가 저절로 나올 만큼 더디게 가는 ‘마법’ 같은 상황에서도 탄핵이라는 단어가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은 그것이 국민들의 머리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기 때문 아닐까. 겨우 내내 “이게 나라냐”라는 자괴감 속에 촛불을 들어 교체한 정권에 대한 기대감이 독선과 분열, 내로남불로 더 큰 실망으로 돌아왔던 기억 역시 트라우마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국민들이 또 거리로 나가게 될까요. 그런다고 세상이 대단히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데 말이죠.” 요즘 만난 지인들의 목소리는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최근 주말마다 야권의 주도로 열리는 장외 집회에 동력이 붙지 않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왜 하필 지금인가’하는 석연치 않은 무엇과 더불어.
이제 선택과 결단은 오로지 대통령의 몫이다. 국민은 대통령의 가족을 ‘악마화’ 할 만큼 한가롭지 않고 국어사전은 죄가 없다. 대통령의 상황에 대한 인식부터 정상화돼야 쇄신의 길이 보인다. 이런 와중에 내년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2기가 시작된다. 통상 현안과 경제 정책 전반을 재점검해야 하고 당장 들이닥칠 방위비 재협상과 대북 관계 등 안보 문제까지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 풀어내야 할 과제들이 산 넘어 산이다. 그런데도 정권의 후반기마저 전반기와 닮은 꼴이 된다면 그건 파국 아닌가.
트라우마를 겪었던 사람들은 유사한 경험을 하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어린 시절 롤러코스터 대신 범퍼카를 탔고 번지점프는 친구가 뛰어내리 것도 쳐다보지 못했다.
탄핵이라는 트라우마를 겪었던 국민들 덕분에 이제 막 반환점을 돈 대통령이 후반전도 뛰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해본다. 만약 대통령부터 자세를 바꾸고 선수진을 전면 교체한 후 전혀 다른 전략을 펴서 후반전을 ‘선방’으로 마친다면 국민들의 찬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천운이다”라는 덕담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박태준 기자 june@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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