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AI는 노동해방을 가져오지 못했나

한겨레21 2024. 11. 1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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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AI 인문학]유토피아 실현하려 한 초기 사이버네틱스 연구… 고수익 금융자본주의와 결합 ‘변질’
3D 렌더링을 통해 구현한 ‘프로젝트 사이버신’의 운영실. 위키미디어

인공지능(AI)의 시대는 과연 대세인가? 지금까지 내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그 ‘대세’라는 인식이 검증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공지능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과학과 기술은 밀접하게 관련이 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기술은 과학에 의지하지만 때때로 과학과 상관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분명 과학적 원리를 보여주지만, 당시 이집트인의 건축기술이 만들어낸 것은 사후 세계에 대한 거대한 신화였다. 인공지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의 원리는 분명 과학적이지만, 그 원리를 실현한 기술의 결과는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AI, 계몽주의 기반 둔 기술문명의 정점

과학과 기술의 불일치는 인류 문명사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중국만 하더라도 기술 측면에서 본다면 근대 이전까지 유럽을 월등히 앞섰지만 과학을 발전시키진 않았다. 과학적 세계관보다는 종교적 세계관에 더 의지했다. 유럽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른바 과학혁명을 통해 이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 전환은 분명 과학적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그 결과는 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이었고, 자연의 힘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변형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기술은 바로 이런 과학혁명의 전환에 근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의 기술은 다른 지역의 기술보다 더 밀접하게 과학에 근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나는 인공지능의 발전을 이런 과학적 계몽주의에 기반을 둔 기술문명이 정점에 도달한 결과물이라고 본다. 한때 이 기술을 거부하고 대안을 추구하는 흐름도 없지 않았지만,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라이제이션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사회적 조건은 추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던 유럽 계몽주의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결과로 작용했다. 유토피아적인 기획으로 남아 있던 다양한 상상이 기술을 만나 현실성을 얻게 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이 상황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지금의 인공지능을 매끄러운 필연성의 산물로 보는 관점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 기술의 문제는 인류가 경험해온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적 문제가 됐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크리스티앙 라발(왼쪽)과 피에르 다르도. 위키미디어

노동해방 위한 소련의 사이버네틱스 연구

최근 출간한 저서 ‘끝나지 않은 악몽’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크리스티앙 라발과 피에르 다르도는 신자유주의가 위기를 통해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기를 먹이 삼아 자신을 급진화하면서 더 강해졌다고 말한다. 이런 신자유주의의 급진화와 오늘의 인공지능 산업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인공지능이 직접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부활에 책임이 있진 않지만,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 논의가 궁극적으로 노동의 위기를 조장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더욱 급진화하는 흐름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원리에 대한 추상적 논의와 인공지능 산업을 움직이는 자본의 논리를 구분해야 한다. 인공지능 자체는 계몽주의에 내재한 해방과 자유의 확대라는 유토피아적 이념을 일정하게 구현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학)에 대한 연구는 당시에 진영을 넘어선 것이었다. 스탈린은 사이버네틱스에 적대적이었지만, 그의 사후 옛 소련의 과학자들은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독자적 연구를 진행해 노동해방이라는 공산주의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런 사이버네틱스의 유토피아주의를 실제로 구현하려 했던 정치세력 중 하나가 바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였다. 아옌데 정부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사이버네틱스 이론에 근거해 ‘사이버신’(Cybersyn·Cybernetics와 Synergy의 합성어)이라는 오늘의 인터넷을 처음으로 구상했다. 영국과 칠레 엔지니어들이 협력해서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 시스템은 컴퓨터를 이용해 경제를 관리하려는 시도였다. 이 당시 컴퓨터는 에니악을 설명하면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에게 친숙한 퍼스널컴퓨터가 아니라 대형 냉장고만큼 커다란 물건이었다.

사이버신은 컴퓨터 기반 경제 관리 시스템을 만들려는 역사상 최초의 시도 중 하나였고, 칠레의 국유화된 경제를 관리하기 위한 실시간 제어 시스템 구축이 목표였다. 또 국영 산업과 정부 간의 조정을 개선하고 경제적 의사결정에 노동자 참여를 촉진하려 했다.

이 시스템은 생산 데이터를 전송하기 위해 공장에 설치된 텔렉스 기계, 경제 정보를 처리하는 중앙컴퓨터(IBM System/360), 모델링과 예측을 위한 통계 소프트웨어, 그리고 미래지향적 디자인의 상징적인 운영실로 구성됐다. 특히 운영실은 제어판이 달린 7개의 회전의자와 경제 데이터와 생산 지표를 보여주는 대형 스크린을 갖추고 있었고,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 디자이너이자 프로젝트의 수석 설계자인 영국의 사이버네틱스 전문가 스태퍼드 비어가 설계한 공상과학 영화 세트장 같은 미니멀리스트, 모더니스트 미학을 자랑했다.

사이버신의 주요 기능은 실시간 경제 모니터링, 생산 추적, 자원 할당, 경제 문제에 대한 조기 경보 시스템, 그리고 공급망 관리였다. 이 시스템은 특히 1972년 트럭 운전사 파업 때 제한된 자원을 조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며 그 가치를 입증했다. 또 디지털 경제 계획의 초기 시도로서 사이버네틱스와 사회주의 경제 이론을 결합했고, 현대의 빅데이터와 실시간 분석 개념을 수십 년 앞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1973년 9월11일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이후 중단됐고, 운영실은 파괴됐으며 대부분의 문서가 소실됐다. 스페인어로는 ‘프로옉토 신코’(Proyecto Synco)로 공식 명명됐지만, ‘프로젝트 사이버신’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비어는 이를 국가 전체 규모로 구현하는 방법으로 구상했다.

AI 구독료와 금융자본주의

비록 프로젝트가 정치적 이유로 파탄 나는 바람에 완전하게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 실험은 데이터 과학과 경제 계획의 많은 현대적 개념을 수십 년 앞서간 기술 혁신과 대안적 경제 관리 접근방식의 흥미로운 사례로 남아 있다. 현재 관점에서 보면, 칠레의 사이버신은 ‘스마트 시티’ 개념을 국가 규모로 확장하려 했던 획기적인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 익숙한 여러 디지털 기술적 개념은 냉전 시기에도 정치적 진영에 개의치 않고 활발하게 실현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현재 이렇게 계몽주의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했던 초기 개발자들의 대의보다도 시장의 논리에 편승한 빅테크 기업의 이익이 우선한 현실일 것이다. 사실 이들은 금융자본주의와 결합한 급진적 신자유주의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제공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챗봇과 같은 인공지능 제품을 사용하면서 지불하는 대금은 미국 달러다. 한화로 결제하더라도 사실상 미국 달러 환율에 따라 결제가 이뤄진다.

인터넷과 결합한 인공지능 제품을 이용하기 위해 구독료를 치르는 이 일련의 과정은 우리 일상 자체를 미국 중심 경제체제로 일원화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당연히 미국 달러 중심의 금융체제는 더욱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인공지능 산업이 미국 달러 중심의 금융자본주의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기술 개발의 가속화가 자기 자신의 위기를 급진화의 계기로 내화시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상상과 그 구현 자체가 자본주의의 산물은 아니다. 명백하게 인공지능은 계몽주의를 추동한 과학적 호기심과 진리에 대한 열정에 따른 결과물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인공지능을 과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지금 인공지능 산업은 신자유주의적 규범을 강화하는 흐름에 일조한다는 점에서 해방적 속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결국 인공지능은 보편적인 노동의 해방이 아니라 수익 구조를 더욱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기존의 노동 분업을 더욱 양극화하고 있다.

기계 반란보다 특정 규범 강화가 문제

몇몇 인공지능 전문가는 고삐 풀린 인공지능 개발이 가져올 ‘특이점’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지만, 내가 보기에 문제는 앞으로 다가올 기계의 반란보다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 변화에 대한 진단과 대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어두운 현실이다. 또한 ‘특이점’보다 더 경계해야 할 점들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일상화가 초래할 특정 규범의 자연화다. 지금도 챗봇에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질문하면 논평을 거부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인공지능의 알고리즘 자체가 선악 규범에 근거해 특정한 입장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과거에 해결하지 못했던 다양한 문제의 해답을 찾고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분명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인공지능 자체를 필연적으로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런 인공지능의 긍정적 측면은 선정적인 마케팅에 압도당한 것처럼 보인다. 인공지능은 충분한 경력을 쌓은 이들에게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복잡한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도입은 지금 새롭게 경력을 쌓아가야 하는 이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효과를 낳는다. 수습이 해야 할 일을 인공지능에 대신 시키면 인건비는 절감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그 분야의 숙련자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모순의 증가는 결과적으로 과거의 자본주의에서 발생했던 문제를 다시 되풀이하게 할 것이다. 물론 적절한 해결책은 인공지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기술 발전이 가져온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정치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기술 사용에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술을 사용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매뉴얼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자에게 개방했을 때 가능하다. 기술이 민주주의와 결합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과거에 인류가 목도했던 것처럼 기술을 독점하거나 반대하는 권위주의의 확대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인공지능 산업은 정치적 권위주의를 자양분으로 삼고 급진화한 신자유주의의 부활에 한몫을 담당한 것이 아닐까.

이택광 문화비평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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