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생김새’ 묻던 소년, 여든께 할아버지 유해 찾았다

허호준 기자 2024. 11. 1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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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뒤 이듬해 옥사한 양천종씨
2019년 12월20일 분묘 개장 작업 도중 무더기로 유해가 발굴된 광주 북구 옛 광주교도소 터. 연합뉴스

“눈 앞이 캄캄했어요. 글이 안 보이더라고요. 처음에는.”

12일 오후, 양성홍(78) 제주4·3유족회 행방불명인협의회장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양씨는 지난 9월 4·3재단으로부터 “할아버지의 유해가 나온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양씨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해 채혈했다. 해마다 대전 골령골에 다니고 있다”며 “할아버지 유해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에 찾게 돼 한없이 기쁘다. 재판도 받기 전에 고문치사 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다”고 말했다.

광주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형무소 무연고자 묘지에서 발굴된 유해 가운데 제주4·3 당시 수감됐던 4·3 희생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광주형무소 옛터 발굴 유해의 유전자 정보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로부터 받아 4·3희생자 유가족의 유전자 정보와 대조한 결과, 새로운 신원을 확인하게 됐다고 12일 밝혔다. 이번 확인된 4·3 희생자는 양 회장의 할아버지 양천종(당시 56)이다. 양천종은 1949년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옥사했다. 재판을 받기 전에 숨져 당시 공소기각 처리된 15명 가운데 1명이다.

양 회장에 따르면, 당시 제주읍 연동마을에 살던 양 회장 가족은 4·3 당시 마을이 소개되자 가족들과 함께 노형 골머리오름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양철종은 1949년 3월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토벌대의 선무공작으로 귀순했다. 그 뒤 제주읍내 주정공장에서 한 달 남짓 수용 생활을 하다 풀려났으나, 같은 해 7월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붙잡혀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양천종은 1949년 11월께 가족들에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낸 뒤 소식이 끊겼다. 가족들은 그해 12월4일 형무소로부터 사망 통보를 받았으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양 회장의 어머니는 시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광주형무소로 갔으나 찾지 못했다. 양 회장은 “어머니가 백방으로 할아버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돈만 날리고 찾지 못해 한스러워했다. 살아계셨으면 정말 좋아했을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양 회장의 고모이자 고인의 딸인 양두영(97·제주시 애월읍)씨는 “아버지 시신이 제대로 있을리가 없을거라 생각했다“며 “평생 그리던 아버지를 이제야 찾게 돼 너무 기쁘고 미안하다”고 했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 허호준 기자

양 회장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양두량·당시 27)는 4·3 때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양 회장은 2022년 8월3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직권재심 재판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안 계시고, 사진도 한장 남기지 않았다. 어릴 때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어떻게 생기셨느냐고 물어봤다. 어머니는 제게 ‘너 거울강(가서) 보라. 너영(와) 똑같이 생겼져’라고 말했다”며 “살아오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관해 물으면 어머니는 언제나 ‘좀좀허라’(잠자코 있어라)라고만 했다”고 말해 방청객들을 숙연하게 했다.

양 회장은 “1999년 신문을 통해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여서 어머니한테 아버지 사망신고를 하자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니다. 아방은 돌아올 거다’고 말했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이번 확인된 유해는 옛 광주형무소 무연분묘터에서 2019년 12월 발굴된 유해 261구 가운데 하나다. 무연고자 묘지는 교도소 안에 사망했거나 연고가 없는 사람의 분묘로, 광주교도가 관리 중이었다. 광주교도소는 1908년 광주감옥으로 문을 열고, 1912년 동명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1923년 광주형무소로, 1961년에는 광주교도소로 명칭이 변경됐다. 1971년 북구 문흥동으로 이전한 뒤 2015년 10월 시설이 낡고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북구 삼각동으로 다시 옮겼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고인의 유해를 예우를 갖춰 고향으로 모셔올 계획이다. 고인의 유해는 다음달 16일 유가족과 제주4·3희생자유족회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계 절차를 거쳐 유족회 주관으로 제례를 지낸 후 화장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제주도내에서는 417구의 4·3희생자 유해가 발굴돼 144명의 신원이 확인됐고, 이번 도외 지역 유해 신원 확인으로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모두 145명으로 늘었다.

도는 올해 대전 골령골 70구와 경산 코발트 광산 42구 등 도외지역 발굴유해 112구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진행 중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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