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판례를 개별 사안 판결로 본다”는 경찰청장···맞는 말일까[팩트체크]
지난 주말 ‘윤석열 정권 퇴진’을 요구한 민주노총 집회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한 이후 노·정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노조 측은 연행된 조합원들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경찰의 탄압을 규탄했지만 경찰은 ‘불법 집회’라며 노조 집행부로의 수사 확대를 예고했다.
그런 와중에 조지호 경찰청장이 경찰의 강경 진압 의혹을 부인하며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에 대한 대법원 판례는 개별 사안에 대한 판결일 뿐”이라는 취지로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집회신고 범위를 벗어난 집회라고 해도 즉시 해산시킬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와 달리 이번 집회를 개별 사안으로 판단해 불법 집회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대법원 판결은 구속력이 있다”며 “경찰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판례가 “개별 사안 판결 뿐”이라는 경찰
조 청장의 발언이 나온 것은 지난 11일 정례 기자회견에서다. ‘대법원 판례는 집회가 사전 신고와 다르다는 이유로 해산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다’는 취재진의 지적에 조 청장은 “(판례는) 개별 사안에 대한 판결”이라며 “영미법에선 판례가 중요시하게 여겨지는데 우리나라는 판례를 개별 사안에 대한 판결로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 청장의 말과 달리 대법원 판례는 개별 사안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2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한 교수는 “대법원 판결은 가장 권위적인 법 해석으로, 모든 국가 기관이 그 해석에 구속을 받는다”며 “대법원 판례에 특정 사건의 유·무죄 판단이 구속되진 않지만 대법원의 법 해석에 대해 국가기관이 따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오민애 변호사는 “대법원까지 가서 판례가 확립됐다는 것은 개별 사실관계는 조금씩 다를 수 있더라도 유사한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된 것”이라며 “조 청장 말대로라면 판례에서 확립된 기준을 어떤 경우에 적용해야 된다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집회·시위 인권침해감시변호단의 최종연 변호사는 “대법원 판례는 해당 집회에만 적용되는 법리가 아니라 동일한 유형의 집회·시위 관리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경찰력 행사의 기준”이라고 말했다.
‘집회 자유 보장’ 판례 취지 이대로 무시되나
대법원 판례는 옥외집회가 사전신고 범위를 벗어나서 이뤄져도 이를 미신고 집회로 취급할 수 없다고 판단해왔다. 또 집회로 인해 다른 사람의 법익이나 공공의 안녕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이 명백하게 초래된 때에만 해산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판단 배경에는 ‘집회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헌법 제21조 2항이 있다. 집회를 경찰 등에 사전 신고하도록 한 것은 행정관청이 공공질서 유지에 협력하도록 하기 위함이지, 경찰에게 집회 개최 여부를 허가할 권한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 청장의 발언은 대법원 판례 취지를 무시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랑희 공권력감시센터 활동가는 “판결 취지는 집회 상황이 유동적일 수 있기 때문에 신고 사항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니라 집회할 권리를 잘 보장하는 것이 우선시 돼야 한다는 것”이라며 “경찰이 기본권 보장에 대해 왜곡된 판단을 하며 대법원 판단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강솔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기존 판례를 무시한 채로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대응하고 적법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개별 사안에 대해) 사후 판단을 받아볼 테면 받아보라는 것인데 적법 절차를 준수할 의무가 있는 경찰청장의 발언으로선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경찰이 지난해부터 이른바 불법집회 강경 대응 방침을 세운 정부 기조에 맞춰 자의적으로 공권력을 남용한다는 분석도 있다. 경찰은 대통령실 용산 이전 이후 대통령실 인근 집회를 금지하는 논리가 법원에서 연달아 인정되지 않았음에도 집회 금지통고를 반복해왔다. 한 교수는 “법원 판결이 어떻게 나든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공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본다면 고의로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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