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기소, 미·일처럼 국민이 결정할 수 있다면?
검찰의 황당한 기소·불기소 처분이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국민 눈높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에 대해서도 검찰은 국민 눈높이를 무시한 무혐의 처분을 내렸습니다. 형사사법에서 ‘국민 눈높이’는 그저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외침에 불과할까요? 말이야 좋은 말이지만 검찰이 무시하면 그만인 ‘빛 좋은 개살구’일까요? 다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미국의 대배심과 일본의 검찰심사회 제도를 살펴보려 합니다. 국민 눈높이가 기소 여부 결정에 ‘실제로’ 관철되는 제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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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범죄 기소를 시민들이 결정하는 미국 대배심
대배심(Grand Jury)은 검사가 범죄 혐의자를 기소하려 할 때 일반 시민들이 그 타당성을 직접 조사해 결정하는 제도입니다. 미국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재판에서 유무죄를 판단하는 배심원과는 별개의 제도입니다(대배심은 비공개로 진행되기 때문에 영화의 소재로 부적합한 측면이 있습니다). 재판에 넘기기 전에 아예 기소 단계에서부터 시민들이 결정권을 갖는 것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020년 대선 직후 조지아주 투표 결과를 조작하려 한 혐의 등으로 지난해 기소된 것도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시민들로 구성된 대배심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5회 ‘미·독·프 어디에도 하나의 검찰은 없다’에서 소개한 것처럼 미국은 연방 검찰과 주 검찰로 나뉘어 있는데, 연방 검찰은 주요 범죄를 기소할 때 대배심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고, 가벼운 범죄의 경우 피고인이 원하면 대배심을 거칩니다. 주 차원에서는 코네티컷과 펜실베이니아를 제외한 48개 주에 대배심 제도가 있고, 23개 주에서 주요 범죄 기소에 대배심을 반드시 거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25개 주에서는 선택적으로 적용됩니다.
대배심은 검사의 요청으로 법원이 소집하는데, 일반 시민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된 12~23명(연방의 경우 15~23명)으로 구성됩니다. 대배심은 증인을 소환하거나 자료를 제출받는 등 실질적 조사 권한을 갖습니다. 대배심 앞에서 증언을 거부하면 법정모독죄로 처벌될 정도로 강력한 권한입니다. 검사는 대배심 앞에서 증인 신문 등을 진행하지만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논의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과반수 배심원(연방의 경우 12명 이상)의 찬성으로 기소 또는 불기소 결정이 내려집니다.
중세의 ‘왕권 강화 수단’에서 현대의 ‘자유 안전판’으로
대배심 제도는 언제, 왜 생긴 걸까요?
그 연원은 중세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형사 절차는 지방 영주나 교회가 주도했는데, 에드워드 2세 왕은 1166년 행정구역별로 12명의 배심원을 선발해 살인·절도·방화 등 주요 범죄를 국왕의 법정에 고발하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형사 절차에 대한 왕권의 개입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14세기 에드워드 3세 때는 행정구역별로 24명의 기사들에게 기소 역할을 맡겼습니다. 이들을 ‘대(大)조사관’이라고 불렀습니다. 기존의 12명 배심원은 재판에서 유무죄를 판단하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전통이 이어져 지금도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배심원을 ‘대배심’으로, 재판에서 유무죄를 판단하는 배심원을 ‘소배심’으로 부릅니다.
대배심 제도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시작됐지만, 17세기 말에 이르러 그 성격이 바뀌는 전기를 맞게 됩니다. 당시 왕은 재판에서 자신이 원하는 판결이 나오지 않으면 소배심원들에게 벌금을 물리거나 투옥시키는 등 형사 재판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는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억울한 이들이 재판에 넘겨지지 않도록 대배심이 기소 여부를 엄격히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1681년 찰스 2세의 정적인 샤프츠베리 경과 스티븐 콜레지라는 인물에 대한 기소를 대배심이 거부한 게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대배심의 역할과 권한이 주목을 받게 됐고, ‘시민의 자유를 위한 안전판’이라는 인식이 확산됐습니다.
18세기 영국 식민지 아메리카에서는 대배심이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통로가 됐습니다. 식민지 시민들로 구성된 대배심은 영국인 관리가 기소되면 분노에 찬 기소장을 작성했고, 영국의 통치에 저항하는 식민지 시민이 기소되면 무혐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1734년 뉴욕의 출판업자 존 피터 젱어가 영국의 폭정을 비판하는 신문을 인쇄한 혐의로 대배심에 두차례 회부됐으나 모두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765년 보스턴에서 영국의 인지세 부과에 반발해 폭동이 일어났을 때도 대배심에 회부된 가담자들이 모두 풀려났습니다. 독립 뒤에도 대배심은 시민들이 악법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남았습니다. 대배심은 도망노예법(노예 제도를 폐지한 주로 도망친 노예들을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한 법률) 등 정의롭지 못한 법으로 선량한 시민이 기소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왕권 강화 수단으로 출발한 대배심 제도는 왕의 폭정을 견제하는 장치로 변모했고, 형사사법 절차에 국민 대표가 참여하는 민주적 유산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정치적 사건에선 시민 판단이 검사보다 낫다”
대배심 제도에 대한 비판도 생겨났습니다. 왕권의 폭압이 사라지고 기소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다른 장치들이 마련되는 상황에서 많은 비용이 드는 대배심을 굳이 운영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회의론 속에 영국에서는 1948년 이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그러나 헌법에까지 대배심 제도를 못박은 미국에서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미국에서도 대배심은 검사 제도가 등장하기 이전에 형성된 제도로, 검사가 직업윤리와 전문성을 바탕으로 기소를 한다면 더 이상 필요없는 제도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또 대배심이 필수적 절차가 아닌 주에서는 법관이 주재하는 예비심문을 통해 기소 여부가 결정되는 등 부당한 기소를 막을 장치가 있다는 점도 폐지론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형사사법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공동체의 시각을 반영한다는 민주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대배심이 입법·행정·사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 기관으로서 “정부와 시민 사이의 완충제 또는 심판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미국 사법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은 대배심을 “자유의 방벽”이라고 칭했습니다.
좀더 현실적인 차원의 대배심 비판론도 있습니다. 대배심이 대부분 검사의 의도를 따름으로써 정작 견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법관은 “검사가 마음 먹으면 대배심으로 하여금 햄 샌드위치도 기소하게 만들 수 있다”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범죄에서는 대배심이 검사의 뜻을 대체로 따르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선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반박이 나옵니다. “배심원은 법관이나 여타 결정권자들보다 더 공정하다. 일반 시민인 그들은 정치적 압력이나 인사상 유불리로부터 자유롭게 때문이다.”(미국 일리노이대 로스쿨 교수 수자 토머스)
시민들이 뜻 모으면 직접 수사·기소하는 제도까지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대배심은 검사가 기소하고자 하는 사안을 심리합니다. 부당한 기소를 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검사가 부당하게 사건을 덮어버리는 경우에는 대배심이 견제 역할을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미국 법학계에서는 검사가 사건을 불기소할 때도 대배심의 판단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일부 주에서 운영되고 있는 ‘시민주도형 대배심’ 제도가 눈길을 끕니다. 캔자스, 뉴멕시코, 노스다코타, 네브라스카, 네바다, 오클라호마 등 6개 주는 일정 수의 시민들이 특정 사건에 대해 청원을 내면 법원이 대배심을 소집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배심은 해당 사건을 조사한 뒤 기소 여부를 결정합니다. 검찰이나 경찰이 외면하는 사건이나 무혐의 처분한 사건을 시민들의 주도로 수사·기소하는 길을 마련해둔 것입니다.
청원은 행정구역인 카운티 단위에서 발의할 수 있는데, 이에 필요한 인원 수는 주마다 달리 정하고 있습니다. 네바다주는 해당 카운티의 직전 총선 투표자 수의 25%, 뉴멕시코주는 해당 카운티 전체 유권자의 2%로 정하고 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실제 이같은 방식의 기소가 이뤄지기도 합니다. 강경 성향의 시민·정치단체가 청원을 주도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이 제도의 정치적 활용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공직자 범죄 등 검찰이 제대로 기소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선 유용한 제도라는 평가가 공존합니다. 시민 참여형 형사사법 제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배심 제도는 영국에서 출발했지만 미국에서 제대로 꽃 피운 제도입니다. 미국에서는 검사 선거 제도(3회 ‘국민 무시하는 검찰, 선거로 쫓아낼 수 있다면’ 참조)에 대배심 제도를 더해 이중으로 검찰에 대한 시민들의 통제 장치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불기소 사건 재검토해 기소 강제하는 일본 검찰심사회
미국의 대배심 제도는 또 다른 나라에서 변형된 형태로 자리잡았습니다. 일본의 검찰심사회입니다. 검사가 불기소한 사건을 일반 시민들이 다시 검토하는 제도입니다. 대배심 제도의 맹점인, ‘부당한 불기소에 대한 견제’에 특화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 뒤 연합국총사령부는 일본 검찰 제도의 민주화를 일본 정부에 명령했습니다. 처음엔 미국과 같은 검사 선거 제도와 대배심 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나, 일본 법무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이들은 반대 이유의 하나로 ‘일본인의 민도가 낮다’는 점을 들었다고 합니다. 절충안으로 도출된 게 검찰심사회 제도입니다.
검찰심사회는 일본 전역 165곳의 지방법원·지원에 설치돼 있습니다. 6개월마다 해당 지역 유권자 중 무작위로 11명을 선정해 구성합니다. 검사가 불기소한 사건의 고소·고발인이나 피해자·유족 등이 신청하면 심사를 시작합니다. 신청이 없더라도 심사회 구성원의 과반수가 동의하면 직권으로 심사에 올릴 수 있습니다. 심사 과정에서는 담당 검사의 출석과 진술을 요구하고, 증인을 소환·심문할 수 있습니다. 심사 결과 8명 이상의 뜻이 모아지면 기소해야 한다는 결정(‘기소 상당’)을 내리고, 그보다 약한 ‘불기소 부당’ 결정은 과반수 찬성으로 내립니다. 기소 의견이 과반수에 못 미치면 불기소가 맞다는 결정(‘불기소 상당’)을 내립니다.
검찰심사회의 결정은 애초 구속력이 없었으나 제도 시행 50년 만인 2009년 제도 개혁으로 기소를 강제하는 효력을 얻었습니다. 제도 도입 당시에도 연합국총사령부는 구속력을 부여하려 했으나 일본 쪽이 ‘시민의 법률적 상식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반대해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제도 개혁 이후 검찰심사회의 ‘기소 상당’ ‘불기소 부당’ 결정이 내려지면 검찰은 기소 여부를 다시 판단해 심사회에 통보해야 하며, 심사회가 재심사를 통해 8명 이상의 찬성으로 기소를 결정하면 강제로 기소가 이뤄집니다. 이때는 검찰을 배제한 채 법원이 검사 역할을 할 변호사를 지정해 바로 재판을 시작합니다.
일본 법무성과 법원 통계를 보면, 제도 도입 이후 2022년까지 검찰심사회에서 처리한 인원은 18만7063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1만9256명(10.3%)에 대해 ‘기소 상당’ ‘불기소 부당’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따라 검찰이 결국 기소한 인원은 1831명(기소율 9.5%)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렇게 기소된 사건 중 1심에서 유죄 판결이 나온 게 1527명, 무죄 판결이 106명이었습니다. 검찰심사회가 처리한 사건의 죄목은 상해·사기·교통사고 등 일반 범죄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직권남용 등 공직자 범죄도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공직자나 정치인 등의 기소에 소극적인 검찰을 감시·견제하는 제도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대배심·검찰심사회 있었다면 김 여사 100% 기소됐을 것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봅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사건과 관련해 검찰은 두차례 수사심의위원회(수심위)를 열었습니다. 수심위는 검찰 외부인사의 의견을 기소 여부 결정에 참고한다는 취지로 만든 제도이지만, 앞서 살펴본 미국의 대배심이나 일본의 검찰심사회와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수심위는 검찰 개혁 요구에 떠밀린 검찰이 2018년 법적 근거 없이 자체적으로 만든 제도입니다. 구성부터가 일반 시민 중 무작위로 선정하는 게 아니라, 검찰 주도로 선정한 150~300명의 전문가 그룹에서 15명을 뽑는 방식입니다. 수심위는 2020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불법 승계 사건에 수사 중단 및 불기소를 권고하고, 이듬해엔 프로포폴 불법 투약 의혹에도 수사 중단을 권고했습니다. 삼성을 적극 옹호해온 교수가 수심위에 참여해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권고의 구속력도 없어 결국 검찰이 알아서 최종 결정을 내립니다. 이번에 수심위는 김 여사 사건과 관련해 한번은 ‘김 여사 불기소’, 한번은 ‘최재영 목사 기소’를 권고했지만 검찰은 입맛대로 두명 모두 불기소했습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선 아예 수사심의위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대배심이나 검찰심사회와 같은 제도가 존재했다면 김 여사는 100% 기소되지 않았을까요? 김 여사 사건은 검찰의 기소 여부 결정이 얼마나 국민 눈높이와 괴리돼 있는지, 국민의 상식과 법감정으로 검찰을 통제하는 게 얼마나 절실한 일인지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국민 눈높이’ 강제할 수단, 지금은 특검밖에 없다
검찰이 국민 눈높이를 배반한 전례가 무수히 많았음에도 여전히 기소 여부 결정권을 검찰에만 온전히 맡겨두는 우리 국민들은 심성이 너무 관대한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듭니다.
형사사법이 국민 눈높이에 맞아야 한다는 건 움직일 수 없는 민주주의 원칙입니다. 국가기관(검찰)이 국민을 대신해 기소권을 행사하는데 이를 그 기관에만 맡겨두면 정치적·개인적 남용 가능성이 큽니다.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흉기가 될 수 있고 부패한 권력자를 감싸는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국가기관이 이 원칙을 따르지 않을 때 국민들은 말로만 원칙을 요구할 게 아니라 직접 나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대배심과 검찰심사회가 그런 제도입니다. 시민에게는 방패가, 권력자에게는 창이 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에게는 그런 주권자 참여 제도가 없습니다. 현재로서 검찰의 ‘부당한 기소’를 견제할 주체는 사법부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부당한 불기소’를 견제할 주체는 국회밖에 없습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다수 국민의 뜻에 따라 특검법을 제정하는 것뿐입니다.
박용현의 ‘검찰을 묻다’는?
검찰공화국을 사는 요즘 시민들에게 검찰에 대한 상식은 교양필수가 됐습니다. 무겁지 않게 검찰에 대한 질문을 하나씩 던지고 독자 여러분과 생각을 나누겠습니다. 격주 화요일 낮 12시에 새로운 글이 올라옵니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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