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가르치려 들더라”…다시보고 미리보는 트럼프식 협상들
그가 돌아왔습니다. 정부엔 당혹감을, 업계엔 황당함을 안겼던 변칙적 통상 정책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좋은 물건을 싸게 만들고, 그걸 미국에 팔아 돈을 벌어가는 나라들에 분노했던 그는, 아예 대통령이 되어 이런 상황을 뜯어고치겠다 결심했고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무역 문제는 트럼프가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그에게 무역은 그의 사고를 지배하는 핵심 우선순위였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자유무역이라는 환상> 중
그는 모두가 잊고 있었던 무역법 조항들을 꺼내 "요술 지팡이(또는 몽둥이)"처럼 휘둘렀습니다. 일방적 관세, 수출 제한, 무역 보복에 맞닥뜨린 나라들은 뒤흔들렸습니다. 이번 대선에선 더 나아가 모든 중국산에 60%, 다른 나라에서 오는 수입품에 20% 관세를 매기겠다고 공약했습니다. 매체와 여야를 불문하고 우려와 대책 탐구에 분주한 이유입니다.
이런 가운데 어제(11일) 전직 통상교섭본부장 4명이 모여 토론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와 직접 협상했던 유명희 전 본부장(2019~2021년 재임)을 비롯해, 김종훈(2007~2011)·박태호(2011~2013)·여한구(2022~2023) 전 본부장을 한국경제인협회가 초청한 자리였습니다. 150석 규모 회의실엔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반대파 사라졌다..."통상압박 더 빠르게 올 것"
참석자들은 우선 1기 행정부보다 무역 압박이 더 빨라질 거라고 봤습니다.
"취임 100일 이내에 속도전으로, 굉장히 일사천리로 밀어붙일 거로 생각됩니다."
─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美 피터슨경제연구소 선임 연구위원)
유명희 전 본부장도 "의외로 속도가 빠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철강에 관세를 매길 때만 해도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의견이 분분했"지만, 반대파가 사라진 2기 행정부에선 밀어붙일 일만 남았단 겁니다.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내 엿 같은 장군들은 겁쟁이들이야. 그들은 무역 협상보다는 동맹에 더 신경을 쓰거든."
─밥 우드워드, <분노> 중
실제로 트럼프는 '싫은 소리'를 싫어했습니다. 2017년 정권 초기 트럼프가 미국이 수입하는 모든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붙이자 말하니 백악관 수석경제고문(개리 콘)이 즉각 반발했습니다. 초대 국무장관(틸러슨), 국방장관(매티스)도 동맹국인 한국에 불리한 조치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러자 트럼프는 '겁쟁이들' 대신 강경파 참모에게 권한을 주고, 관세를 밀어붙였습니다.
그시절 참모들은 막아야 할 일이 있으면 꼼수도 썼습니다.
콘 보좌관은 2017년 5월 대통령 책상 위에 놓인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을 탈퇴한다는 행정명령 초안을 몰래 빼돌렸습니다. "눈에 안 보이면, 트럼프는 잊을 거야." 9월 한미 FTA 탈퇴 통보 서한을 발견하곤 또 슬쩍 가지고 나왔습니다. 트럼프는 문서가 사라진 사실을 끝까지 몰랐고 한미 FTA 파기도 없던 일로 지나갔습니다.
"8년 전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 정책의 방향을 선회했고, 바이든 정부의 기조도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책이 양당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확신에 찬 트럼프는 보편 관세 부과와 같은 조치를 훨씬 강력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할 겁니다."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서울대 국제대학원 객원교수)
서류 빼돌리기마저 감행할 참모는 이제 없습니다. 트럼프를 비난했던 바이든도 집권 후에는 방식만 달랐을 뿐 보호무역주의를 이어왔기에 '적으로부터의 검증'도 마쳤다고 트럼프는 판단합니다. 속도전에 대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1기 행정부에서 흐지부지된 자동차 관세 부과가 빠르게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고 참석자들은 전망했습니다.
"트럼프 1기 당시 자동차 협상을 담당했던 인사들을 나중에 만났더니, '그때 (관세 부과를) 해야 했는데, 못 한 것을 정말 후회한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
올해 1~9월 한국의 대미 흑자 3분의 1 이상(34.4%)이 자동차와 부품 덕이었습니다. 한미 FTA 덕에 양국 자동차 교역에는 관세가 거의 안 붙습니다. 이걸 알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는 2019년 자동차 수입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실업률을 올린다고 발표하며 자동차에 관세를 부과할 명분을 쌓았습니다. 2020년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실행에 옮기진 못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협상...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우리가 처음 해야 할 것은, 예외를 받을 수 있는가 보는 겁니다. 우리가 트럼프 1기 때 철강에서 예외를 받았듯, 구체적인 논리와 함께 거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
트럼프 행정부는 일단 관세 부과를 일방적으로 발표한 후, 협상을 해 보고 면제를 해 주는 식이었습니다. 철강도 그랬습니다. 트럼프 정부는 먼저 모든 나라에 24% 관세를 매기되 한국과 중국, 브라질 등 12개국에는 53%를 부과하겠다며 협상을 요구해 왔습니다.
한국은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자동차에서 일부 내주고 철강 수출량을 제한하되, 관세를 면제받기로 했습니다. 한국산 철강 중 11%만 미국으로 수출되기에 타격은 제한적이었고, 미국으로서도 나름대로 손에 쥔 성과가 있었던 셈입니다.
다만, 당시 한국의 협상을 이끌었던 유명희 전 본부장은 '논리적 설득'만으론 부족하다며 무역 적자를 실제로 줄일 방법을 찾아 지지층에 보여줘야 하는 트럼프의 의도를 정확히 봐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유 전 본부장에 따르면, 트럼프 1기 행정부와 협상할 당시 한국은 대미 투자가 연간 100억 달러(약 13조 원, 2016년)를 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건 그거고'라는 반응이었습니다.
"한국의 투자를 설명했지만, 미국의 중점은 여전히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할 신속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데에 가 있었습니다."
"후일담을 들어보니, 한국이 오히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해소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가르치려는 태도였다는 얘기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
유 본부장은 앞선 언론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적자를 직접 들여다본다"고 밝혔습니다. 하필 한국은 올해 1~9월 미국을 상대로 역대 최대 흑자를 냈습니다.
■"면제받아도 안심 못 해"…베트남·멕시코를 주시하는 이유
"우리가 협상을 잘해서 관세 면제를 받는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닙니다.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 기업의 수출 20% 이상이 미국으로 가는데, 베트남도 대미 무역흑자가 늘자 2020년 트럼프 행정부의 '301조 조사'를 받았습니다."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
한국 기업의 수출은, 한국 밖에서도 활발합니다. 한국 기업이 진출한 국가가 불이익을 받으면, 한국 기업도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트남을 보겠습니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무역에서 한국보다 더 많은 흑자를 냅니다. 외국기업이 현지에서 물건을 만들어 세계 각지로 재수출하는 덕입니다. (2022년 베트남 전체 수출량의 17.5%가 현지에서 생산된 삼성 제품이었습니다)
그러자 미 무역대표부는 2020년 베트남의 불공정 무역행위를 조사했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면 무역법 301조에 의한 보복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국 다음은 베트남인가? 우려가 제기되던 도중 대선에서 승리한 바이든 대통령이 이를 중단했습니다.
이에 대해 트럼프와 참모들은 큰 불만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베트남 무역흑자를 줄이겠다고 다시 나서면 현지에서 생산 중인 한국 기업들도 같이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멕시코도 들여다봐야 합니다. 트럼프는 앞서 말한 미국과 캐나다-멕시코 3국의 자유무역협정인 나프타(NAFTA)가 미국에 너무 손해라며 탈퇴를 결정했다가 참모들의 만류로 재협상하고 이름도 USMCA로 바꿨습니다. 미국 제조업과 고용을 되살리기 위해 북미산 자재와 부품 사용 비중을 높이고 멕시코 등지에서의 저임금 노동을 제한했습니다.
동시에 멕시코는 협정 이후 자국 생산품이 북미산으로 인정되는 혜택을 받으면서 해외기업의 투자를 많이 받았고 미국으로 더 수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미국 수입액 가운데 멕시코산 비중은 중국을 제치고 1위(15.4%)였습니다.
트럼프 입장에선 두고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3국은 협정 발효 6년이 되는 2026년에 '공동 심의(joint review)'를 하는데, 말이 심의지 사실상 재협상이 시작될 거라고 유 전 본부장은 예측했습니다.
"뭐까지 나올 수 있느냐. 당시 미국은 '미국산' 부품을 50%까지 써야 한다는 요구까지 했다가 협상 타결을 위해 중간에 철회했습니다. 그보다 더 엄격한 요건을 재협상 과정에서 도입할 수 있고, 북미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
특히 트럼프 당선인은 멕시코가 미국으로 가는 불법 이민자를 막지 않으면 모든 멕시코산 제품에 25% 관세를 붙이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유 전 본부장은 "다른 문제와 연계해 언제든 (멕시코산에) 관세를 꺼내 들 수 있어서, 멕시코 진출 기업들은 USMCA 개정 동향을 주시하며 정부와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래도 기회는 있다…한미 '윈윈' 방법 찾아야"
얘기를 듣다 보니 답답해집니다. 세계 최강국, 최대 소비시장을 가진 국가가 '더는 호구가 되지 않겠다'며 부담을 강요합니다. 피할 수는 없습니다. 다행이라면, 4년 전에는 트럼프라는 돌발 존재 앞에 '맨땅에 헤딩'이었다면, 이제는 경험과 자료가 축적돼 있습니다.
한미FTA 체결 협상을 지휘하며 '검투사'라는 별명을 얻었던 김종훈 전 본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덜 팔자'만 하지 말고, '미국에 뭐가 경쟁력이 있는데? 그걸 더 사 오자' 해야 합니다. 그걸 발굴하면 양쪽이 윈윈할 수 있습니다. 단기적 위기를 장기적 기회로 살려야 합니다."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
정부가 지금 미국산 가스와 원유를 더 수입할지 검토 중인데, 김 본부장은 로켓이나 민항기 제조 기술을 사 오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보조금이 줄어 전기차 분야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면 에너지저장장치(ESS) 분야 진출을 늘리는 식으로 대응하자고도 했습니다.
여한구 전 본부장은 8년 전,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할 당시보다 미국 내에서 한국 기업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며 미국이 한국의 도움이 필요할 분야를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트럼프 당선인이 '조선산업에서 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는데, 이런 게 딱 힌트라고 생각합니다.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등 미국 제조업 재건은 한국 도움 없이는 어렵습니다. 조선이나 군수산업, 원자력, 천연가스 같은 분야에서 한미가 협력해 볼 수 있을 겁니다."
─ 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
"대미 무역 흑자가 막대한 국가들은, 우리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면 더 많이 잃어야 할 것이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자유무역이라는 환상>
양보하라, 그렇지 않으면 잃을 것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대놓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어떻게 더 설득하고 얼마나 덜 잃을 것인가. 상대가 바뀐 협상장에 들어설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조병제. (2024). 위기인가 기회인가, 트럼프의 귀환. 월요일의 꿈.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2024). 자유무역이라는 환상. 마르코폴로.
Woodward. (2020). Rage. Simon&Schuster.
배상윤. (2024년 11월 9일). "트럼프 직접 무역수지 들여다봐…美 에너지 수입 확대도 방안". 한국경제. A03.
이슬기. (2024년 11월 10일). "작년 韓 해외투자 43% 미국으로…美제조업 이끄는 '한국 중간재'.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41109002500003
이윤범.(2023). 글로벌 기업의 생산 기지로 부상하고 있는 베트남의 향후 전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https://www.kiep.go.kr/aif/issueDetail.es?brdctsNo=353175&mid=a30200000000&systemcode=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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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기자 (new@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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