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각장애 과부가…술 팔아 조선 최고의 명문가 키웠다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11. 1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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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 아이의 출생과 성장
영의정 홍순목, 우정국 총판 홍영식 일가(1884년). 중간에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홍순목이고, 뒷줄은 장남 홍만식, 둘째 홍영식, 세째 홍정식 순이다. 홍영식이 1884년 음력 10월 갑신정변 주모자로 살해되고 홍순목도 자살하면서 집안은 몰락했다. 사진은 종로 재동 저택(현 헌법재판소)에서 거사 직전에 찍은 듯하다. [미국 보스턴미술관(퍼시벨 로웰 컬렉션)]
젊은 세대들이 출산을 기피하지만 나이가 들면 무자식을 후회하게 된다. 아이는 국가의 미래이기 앞서 가족의 미래다. 조선시대에는 모두들 가난했지만 다산(多産)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혼례에서 신랑은 신부집으로 향할 때 나무 기러기를 들고갔다. 금슬 좋은 기러기처럼 백년해로 하겠다는 의미다.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 혼례 때 산 기러기를 들고 가는 관원을 기럭아범(집안자·執雁者)이라 했다. 기럭아범은 충찬위(忠贊衛·원종공신 자손으로 구성된 수도경비부대)에서 선발했다. 풍채도 조건이지만 무엇보다 아들을 많이 낳은 사람이어야 했다.

1704년(숙종 30) 2월 21일 치러진 숙종의 아들 연잉군(영조·재위 1724~1776)과 정성왕후 대구 서씨(1693~1757)의 가례때 병조는 기럭아범 후보로 한성부 동부의 최영발, 북부의 김시감, 남부의 최간을 올렸다. 가례청 회의는 이들 중 아들이 제일 많은 김시감을 낙점했다.

1802년(순조 2) 순조(재위 1800~1834)와 순원왕후 안동 김씨(1789~1857)의 가례 때부터는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병풍을 특별제작했다. 그림은 당나라 현종 때 실존인물인 곽자의(郭子儀)의 영화롭고 다복한 생애를 묘사했다. 곽자의는 안녹산의 난을 평정해 분양왕에 봉해졌고 85세까지 장수하면서 8남7녀의 자식을 둬 다복의 상징이 됐다. 왕실의 다산을 바라는 염원을 병풍에 담았던 것이다. 곽분양행락도 병풍은 왕비나 왕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성들이 가례 당일까지 머무는 별궁에 항상 배치됐고 민간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은 “곽분양행락도는 서울 양반가에서 혼례 때 꼭 사용하는 병풍”이라고 했다.

“다산(多産)이 미덕, 자식은 10명 이상 돼야”···초산연령 낮아 산모 사망 빈발
상투를 틀고 정자관을 쓴 소년들(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조선에 왔던 미국 소설가 잭 런던 주위로 소년들이 서 있다. 잭 런던 바로 앞의 소년은 매우 어려보이지만 이미 장가를 가서 어른 차림을 하고 있다. 혼인연령이 낮다보니 어린 산모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컬렉션)]
조선시대에는 영아 사망률이 높기도 했지만 조상의 생명이 후손의 몸을 통해 대대로 이어진다는 유교적 인식에 따라 자녀를 많이 가져야 복이 있다는 다산관념이 지배했다. 여성 입장에서도 가족과 사회 내에서 당당한 발언권을 가지려면 가문을 계승할 후손을 많이 낳아야 했다.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아들 4~5명을 두면 모두가 부러워하고 7~8명을 두면 기이하게 여기고 10여명을 두면 세상에 드문 예라 하여 큰 복(홍복·弘福)으로 칭한다”고 했다. 숙종비 인경왕후 광산 김씨(1661~1680)의 오빠 좌참찬 김진구(1651~1704)는 부인 한산 이씨와의 사이에서 8남3녀를 둬 홍복을 누린 이로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의술이 낙후됐던 과거 아이를 낳다가 산모가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자식을 가지려는 욕구가 강해지면서 일찍 혼인하고 초산 연령이 낮아지면서 출산 위험도 훨씬 증가했다. 김상헌의 손자 영의정 김수항(1629~1689)은 늦둥이로 태어난 외동딸이 출산하다가 죽자 직접 제문을 지었다. 딸은 1665년 태어났고 14세에 전주 이씨 우의정 이후원(1598~1660)의 증손 이섭과 결혼했다. 16세에 여아를 낳고 이틀 만에 산후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갓난아기도 닷새 후 엄마 뒤를 따라갔다. 김수항은 딸을 무척 아꼈다. 김수항의 <문곡집> ‘제망녀문(祭亡女文)’은 “부모 된 마음으로 애지중지한 것이 어찌 손 안의 아름다운 옥구슬 정도 뿐이었겠느냐. 나와 네 어머니는 늘그막에 즐거움이라고는 단지 너 하나였는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잃고 말았구나. … 애통하고 애통하도다”라고 슬퍼했다.

각종 질병으로 대부분 어린시절 못넘겨, 홍역으로만 한해 1만명 목숨 잃기도
군부대신 윤웅렬 가족. 윤웅렬과 그의 장남 윤치호(맨뒤)가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어린 아이들은 면역체계가 형성되지 않아 질병에 취약하다. 조선시대 유아사망률에 큰 영향을 끼친 질병은 홍역(紅疫)이다.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는 홍역은 고열을 동반한 급성 전염병이다. 세계적으로 16~17세기 유행했고 한국에서도 1613년, 1668년, 1680년, 1706년, 1718년, 1729년, 1752년, 1775년, 1787년, 1812년, 1872년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쳐 사망자가 속출했다. <승정원일기> 1730년(영조 6) 1월 21일 기사에서 한성부 5부의 홍역피해 현황을 보고받은 영조는 “부의 관리들이 아뢴 말로 살펴보면 홍역으로 사망한 자의 숫자를 합하여 거의 1만에 가까우니 너무나 놀랍고 참혹하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대부 남성이 의약지식을 닦는 일은 기초소양 중 하나였다. 16세기 서울 주자동에 거주한 성주 이씨 이문건(1494~1568)은 조광조의 제자이며 명필로 이름 높았다. 1528년(중종 23) 과거에 급제해 승정원 좌부승지(정3품 당상관)를 했다.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에 연좌돼 1545년(명종 즉위년) 성주로 유배를 갔고 그곳에서 죽었다. 이문건의 <묵재일기>에 따르면, 그는 23세 때 안동 김씨 김언묵의 딸 김돈이와 혼인했다. 이들은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뒀지만 장남과 막내 딸만 장성했다. 장남은 병치레가 잦았고, 막내도 천연두를 잘 넘겼지만 풍에 걸린 뒤로 자주 놀라 소리를 지르다가 간질로 번졌다. 막내는 14~15세 병세가 심해졌고 혼인도 못한 채 20살에 요절했다. 이문건은 의원이 아니었지만 의원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해박한 의학지식을 갖췄다. 그는 <구급간이방>, <구급방>, <구급이방>, <단계방>, <단계찬요>, <동인도>, <득효방>, <명의잡저>, <본초>, <본초연의>, <신응경>, <양로서>, <연수서>, <영류검방>, <의안방>, <의학정전>, <의학집성>, <직지맥>, <집성방>, <혈법도>, <화제방>, <활인심법>, <황달학질치료방> 등의 의서를 탐독하며 가족의 질병에 대처했다.

1613년 <동의보감>이 편찬된 후로는 이 책이 선비의 필독서가 됐다. 18세기 서울의 남산 아래 창동(倉洞‧남대문시장)에 살던 선비 유만주(1755~1788)의 일기 <흠영(欽英)>은 <상례비요(의례서)>, <삼운성휘(음운서)>, <대전통편(법전)>과 함께 <동의보감>을 선비가 갖춰야할 4대 서적으로 꼽았다. 유만주는 “허준의 동의보감이 나온 뒤로 조선에는 훌륭한 의원이 없다”고 했다. 유만주가 살던 시기에는 소아과 전문의도 있었다. 유만주 1781년 재혼한 박씨 부인에게서 첫딸을 얻었지만 첫돌도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렸다. <흠영>은 “의녀를 불러 딸을 보이고 약방문을 받았으며 그 처방을 소아의 이행눌에게 보이자 이행눌은 한가지 약재는 쓰지 말라고 일러주었다”고 했다.

사대부들, 아이들 지키려고 스스로 국내외 의학서 탐독
외국인 선교사와 여자 아이들(20세기초). 조선시대에 아들만 귀하게 생각했을 것 같지만 영의정 김수항의 예에서 보듯 의외로 유학자 중에서도 딸 바보들이 많았다. [부산시립박물관]
자식, 그중에서도 아들이 다행히 살아남았다면 양반가에서는 아들이 문과에 급제해 입신양명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집안을 일으키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자식교육하면 대구 서씨 약봉 서성(1558~1631)의 어머니 고성 이씨를 빼놓을 수 없다. 고성 이씨는 눈먼 소경이었지만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억척스럽게 살았다. 김상헌(1570~1652)의 <청음집>의 ‘서성 공 행장’은 “(약봉의) 어머니 정경부인 고성 이씨는 좌의정 이원의 후손이며 청풍군수 이고(李股)의 따님이다. 이분이 1558년(명종 13) 5월 안동에 있는 외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기걸하여 보통 아이와 같지 않았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함재공(약봉의 아버지 서해·1537~1559)이 돌아가셨을 때 공은 겨우 한 살이었다. 대부인께서 외롭게 홀로 되어 살아가기 어려울 것을 걱정해 경성으로 가 공의 중부인 사예공(서엄)에 의지하였다”고 했다.

고성 이씨는 아들을 데리고 상경해 약현(藥峴·중구 중림동)에 정착했다. <동국여지비고>는 “서성의 집 숭례문 밖 약현에 있다. 공의 어머니인 이씨는 두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여러가지 일에 익숙했다”고 했다. 또 <한국야담사화집>에 의하면, 고성 이씨는 약현 고개길(서울역~충정로 사거리) 옆에 거처(약현성당 일원)를 마련했다. 아들 출세의 일념으로 20대 초반의 청상은 반가의 체통을 내던지고 이 집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청주를 빚고 유밀과와 찰밥을 만들어 팔았는데 손님이 많아 큰돈을 벌었다. 당시 사람들은 약현의 그녀 집에서 만든 청주를 ‘약주’, 찹쌀밥을 ‘약밥’, 유밀과를 ‘약과’라 불렀고 오늘날까지 그명칭이 전해진다.

가난해도 자식교육에 지극정성···양반 체통 던지고 술 장사, 유배지에서 자식 지도
서당(대한제국). 사대부가에서는 아들을 공부시켜 벼슬길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어머니의 헌신 덕에 서성은 1586년(선조 19) 과거에 급제해 5도 관찰사, 3조 판서 등 요직을 거쳤고 기울어져 가던 가문도 다시 일으켰다. 서성의 다섯 아들과 그들의 자손이 모두 크게 현달했다. 장남 서경우(1573~1645)는 인조때 우의정을 지냈고 넷째 서경주(1579~1643)는 선조의 장녀 정신옹주(1582~1653)와 혼인했다. 둘째 서경수(1575~1646)의 증손 서종제(1656~1719)의 딸은 영조의 정비(정성왕후‧1692~1757)가 됐다. 또 서경주의 증손 서종태(1652~1719)는 숙종 때 영의정을 했고 그의 둘째 아들 서명균(1680~1745)은 1734년(영조 8) 좌의정, 서명균의 아들 서지수(1714~1768)는 1766년(영조 42) 영의정에 올라 서경주 집안에서 3대 연속 정승을 배출했다. 이어 서지수의 아들 서유신(1735~1800)부터 서유신의 아들 서영보(1759~1816), 손자 서기순(1791~1854)이 문형인 대제학을 연속으로 하면서 문벌가로 위세를 떨쳤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다산은 1801년(순조 1) 9월 천주교 신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된 형 정약종을 보호하려다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아들 6명과 딸 1명을 뒀지만 장남 정학연(丁學淵·1783~1859)과 차남 정학유(丁學游·1786~1855) 외에는 3세 이전에 모두 사망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 묶인 몸이었지만 두 아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며 교육에 깊게 관여했다. <다산시문집>에 따르면, 1803년(순조 3) 1월 1일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편지로 써 공부를 힘쓸 것을 권면한 것이 여러 차례이건만 아직 한번도 경전의 의심스러운 곳이나, 예악(禮樂)의 의문스러운 점, 사책(史冊)의 논란을 한 조목도 묻는 적이 없었으니 어찌하여 너희들은 이렇게 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지 않느냐”며 “너희는 집에 책이 없느냐, 재주가 없느냐, 눈과 귀가 총명하지 못하느냐, 무엇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려 드는 것이냐”고 꾸짖었다.

정약용은 외딴 시골(남양주 초안면)에서 살던 두 아들의 장래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유배에서 풀려나면 반드시 서울 안에 살게 하겠노라고 다짐도 한다. 1810년 초가을 편지에서 “무릇 사대부의 가법은 벼슬길에 나갔을 때에는 높직한 산 언덕에 셋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의 본색을 잃지 말아야 하지만 벼슬에서 떨어지면 빨리 서울에 살자리를 정하여 문화(文華·문명)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내가 지금 죄인이므로 너희들을 우선은 시골집에서 숨어 지내도록 하였지만 뒷날은 오직 서울의 십리 안에서 거처하게 하려한다.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잠시 근교에 머무르며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도심 중앙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정약용 자식 위해 “반드시 한양 안에 살 것”, 서울 집중 병폐는 오랜 역사
여성과 어린이들(대한제국). 조선시대에는 가난해도 아이들을 많이 낳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선조대 명신 백사 이항복(1556~1618)은 52세 때 어린 손자에게 글을 깨우치게 하고자 손수 천자문(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써 책으로 엮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책 뒷면에 “1607년(선조 40) 초여름 손자 시중에게 써 준다. 오십 노인이 땀 흘리고 고통을 참아가며 쓴 것이니 나의 뜻을 생각해서 함부로 다루지 말지어다”라고 적었다. 손자를 향한 할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이 묻어난다. 천자문은 굵고 단정한 해서체로 한자 한자 정성들여 썼다. 손으로 쓴 천자문으로는 시기가 가장 이르다. 이항복 가문은 그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번창했으며 그의 직계에서만 영의정 3명, 좌의정 2명 등 정승만 5명이 나왔다. 하지만 장손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천자문을 선물 받았던 손자 이시중(1602~1657)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유사이래 가장 잘 살게 됐지만 그와 동시에 인구가 가장 빨리 감소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대신 개를 기른다니 미래가 걱정스럽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경도잡지(유득공).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문곡집(김수항). 묵재일기(이문건). 흠영(유만주). 청음집(김상헌). 동국여지비고. 다산시문집(정약용)

2. 서울사람들의 생로병사. 서울역사편찬원. 2020

3. 중구사화(中區史話). 서울 중구문화원. 1997

4. 한국야담사화집. 동국문화사. 1959~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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