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으로 떠돌던 8천만 '객가'의 고향…매화 가득한 그곳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11. 1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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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만리,성시인문(縱橫萬里-城市人文)] 매화를 이름에 품고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도시 : 광둥성 메이저우(梅州) (글 : 한재혁 전 주광저우 총영사)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중국 남부에 있는 큰 고개인 다위링(大庾嶺) 아래쪽에는 매화꽃에서 이름이 유래된 지역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도시 이름에 아예 매화를 넣은 광둥성 메이저우(梅州)이다. 메이저우시는 인구 500만의 도시이지만, 이보다 더 많은 약 700만 명의 이 지역 출신 객가(客家) 화교들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객가인의 수도(客都)'라고 불리는 특이한 도시이기도 하다.

메이저우에서 북서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다위링은 중국 링난(嶺南) 지역을 구분하는 다섯 개 산맥 중의 하나로, 당나라 시인 장구령(張九齡)은 이곳의 고갯길 양편에 매화나무를 심고 이를 매령(梅嶺)이라고 하였다. 이후 매화꽃이 만발하자 백거이(白居易)는 '매령에 매화가 일만 그루 나무에 피었다(梅嶺花排一萬株)'고 읊었고, 다위링의 '고개 남쪽에는 매화가 피었다 지는데, 북쪽에는 이제야 꽃이 피기 시작한다(南枝旣落,北枝始開)'는 말도 생겨났다.

이 길은 중국 중원(中原) 지역에서 남쪽(嶺南)을 잇는 교통의 요충이기도 하였는데, 송나라 때는 이 고개에 관문을 설치하고 매관(梅關)이라 하였다. 이 매령과 매관은 남쪽 지역으로 유배 가는 관리, 북으로 과거 보러 가는 유생들이 피고 지는 매화꽃 사이로 통과하는 사연 많은 관문이 되었다.

매화꽃 핀 메이저우시 전경

매화의 원산지는 중국 쓰촨(四川), 후베이(湖北), 광둥(廣東) 일대로 알려져 있다. 매화(梅花)만큼 동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문화적 함의를 갖는 꽃도 드물다. 추운 겨울 가장 먼저 꽃을 피워 꽃 중의 형(花兄)이라거나 우두머리(花魁)라고 불렸고, 일찍 피는 매화는 동매(冬梅)나 한매(寒梅), 또는 설중매(雪中梅)라 불렀다.

추위와 어려움 속에서 견디는 이미지로 군자와 선비를 상징하여 세한삼우(歲寒三友) 이자 사군자(四君子) 중 하나였으며, 신선과 은자를 상징하여 매선(梅仙), 매은(梅隱)이라는 말도 생겼다. 북송의 은일(隱逸) 시인 임포(林逋)는 매화(梅)를 아내(妻)로, 학(鶴)을 자식(子)으로 삼아 은둔하면서 인생을 유유자적하여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소동파(蘇東坡)는 광둥에 귀양 중 매화꽃으로 유명한 뤄푸산(羅浮山)의 매화를 보고 "뤄푸산 아래 마을에 매화꽃이 피었네, 눈을 뼈로 얼음을 혼으로 하였구나(羅浮山下梅花村,玉雪爲骨氷爲魂)"라고 묘사했다.

메이저우 매화

매화꽃이 많은 이 지역이 객가(客家)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된 데는 연유가 있다. 중국 역사는 어찌 보면 전쟁과 난리로 점철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전쟁사에 따르면 역사에 기록된 것만 약 7,800차례에 달하는 전란을 겪었으며, 기간으로 따지만 5000년에 가까운 기간 중 불과 300년간만 세상이 평안하였다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 유난히 전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피난민으로 떠돌며 고생한 이들이 있는데 바로 객가(客家) 사람들이다. 중국어 표준어로는 '커자(kejia)'라고 하고, 객가어로는 '학카(Hakka)'라고 발음한다. 객가는 혈통에 의해 형성된 민족(民族)의 개념이 아니라 제도에 의한 민계(民系)의 개념이다. 진(晉)나라 때, 호적 제도에서 자기 땅을 갖고 경작하는 지주 가구가 아닌 땅이 없는 소작농들을 객호(客戶)라고 분류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즉, 땅 주인이 주호(主戶)라면 이에 딸린 가구는 객호가 되는 것이다. 이 객호의 대상이 점차 외지인들과 소규모 상인 등으로까지 확장되었고, 전란이 나거나 하면 이들이 가장 먼저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이동하면서 집단화하고 같은 언어와 문화까지 공유하게 된 것이다.

객가 음식 문화

객가어(客家語)는 고대 중국어의 화석(化石)이라고 불리는데, '나'나 '너'와 같은 단어는 현대 중국어의 워(我), 니(你)가 아닌 오(吾), 이(爾)와 같은 고어의 음가(古音)를 사용한다. 이들이 처음 남천(南遷)한 것은 약 1,700년 전으로, 북녘의 흉노와 선비족들의 침략으로 인해 중원(中原) 지역이 오랑캐 세상이 되자 한수(漢水)와 장강(長江)을 따라 후베이(湖北), 안훼이(安徽), 장쑤(江蘇) 등으로 남하하여 정착하였고, 먼 지역으로는 메이저우(梅州)의 땅까지 이동하여 자리를 잡게 된다. 이 시기 장장 170년에 걸쳐 이동한 인구수는 1~20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당나라 안사(安史)의 난 시기, 북송에서 남송으로의 천도 시기, 만주족의 중원 입성 시기 등에 오랜 시간에 걸쳐 각각 중부 지역에서 고개를 넘어 메이저우를 중심으로 한 광둥성과 장시성, 푸젠성 등 일대에 정착한다.

객가인들은 전통을 중시하여 언어도 고대 언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충효나 예절과 같은 유가 사상과 집안 교육, 가훈(家訓) 등을 중요시한다. 지금도 메이저우 인근에는 바깥세상과 떨어져 객가 가족들끼리 개간지를 일구며 살았던 웨이우(圍屋)나 투러우(土樓)라 불리는 특유의 주택과 주거 환경을 볼 수 있다. 조상을 기리기 위한 사당(祠堂)이나 궁묘(宮廟)도 지었다.

객가인들의 건축 양식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전통과 교육, 수신제가(修身齊家) 사상의 훈도를 입어서인지 역사적으로 유난히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 신중국 혁명가 주더(朱德), 쑨원(孫文)과 그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대문호 궈모뤄(郭沫若),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李光耀), 타이완 총통 마잉주(馬英九)와 차이잉원(蔡英文), 타이완 영화감독 허우샤오시엔(侯孝賢), 홍콩 영화배우 장국영(張國榮), 여명(黎明), 종초홍(鐘楚紅) 등도 객가 출신이다. 광둥, 홍콩, 타이완,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중국과 동남아 및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객가 출신 인구는 약 8,000만 명에서 1억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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