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 처방전 없이도 동물약 살 수 있다니…
※반려동물 인구 1500만 시대. 반려동물과 행복한 동행을 위해 관련법 및 제도가 점점 진화하고 있다. ‘멍냥 집사’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반려동물(pet)+정책(policy)’을 이학범 수의사가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동물용 의약품과 관련한 충격적인 실태가 지적됐습니다. 바로 비아그라와 동일한 성분의 동물약을 약국에서 반려동물 사육 여부와 상관 없이 그냥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악용될 수 있는 동물약을 약국에서 확인 없이 판매하는 것이 '합법'이라는 점에서 더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올해 보건복지부 국정감사에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은 직접 약국에서 산 '실리정'이라는 동물약을 보여주며 "반려동물도 없는데 약국에서 반려견 심장약인 실리정을 구매했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실리정은 '개의 폐동맥 고혈압에 의한 심부전 치료' 목적으로 허가받은 동물약입니다. 실리정의 성분 중 하나는 발기부전 치료제로 유명한 '비아그라'의 주성분인 '실데나필(Sildenafil)'입니다.
사람 투약 등 오남용 우려 커
비아그라 특허는 2012년 만료됐고, 이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제네릭 의약품(일명 카피약)이 출시됐습니다. 실데나필 성분의 동물용 의약품도 다수 출시됐죠. 그중 하나가 바로 실리정입니다. 실리정 1정에는 실데나필 100㎎이 포함돼 있습니다. 비아그라 최대 용량 제품도 1정에 실데나필 100㎎이 들어 있죠. 용량이 똑같은 만큼 사람이 실리정을 구매해 발기부전 치료 목적으로 자신에게 투약할 위험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졌듯이 비아그라는 전문의약품입니다. 의사 처방이 있어야만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려동물도 안 키우는 일반인이 약국에서 그냥 실리정을 샀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유는 약사법에 있는 '예외조항' 때문입니다. 인체용 의약품은 의사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과 처방전 없이 바로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나뉩니다. 정부가 의사의 정확한 진단이나 처방 없이 사용할 경우 오남용 우려가 큰 의약품을 전문의약품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죠. 동물용 의약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남용 우려가 있는 동물약은 수의사 처방이 있어야만 판매·구입할 수 있도록 별도로 지정해 관리합니다. 일명 '수의사처방대상 의약품'입니다.
당연히 실데나필 성분의 동물용 의약품도 처방대상 의약품으로 분류돼 있습니다. 그런데 약사법 제85조 7항은 이에 관한 예외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약국 개설자는 수의사처방대상 동물용 의약품을 수의사 처방전 없이 판매할 수 있다"는 조항인데요. 쉽게 말해 수의사 처방이 있어야 구매할 수 있는 처방대상 의약품을 약국에서는 처방전 없이 판매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조항이지만, 2024년 현재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조항입니다.
동물용 의약품 법 개정 필요성
이 예외조항에 따라 남인순 의원이 약국에 가서 "반려견용 심장병 약을 달라"고 했을 때 약사가 합법적으로 실리정을 판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의사 처방전이 필요 없고, 심지어 반려견을 기르지 않아도 됩니다. 남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이 같은 실태를 지적하자 일각에서는 "귀찮게 비뇨기과에 가서 의사의 비아그라 처방전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약국에 가서 반려견 심장약을 달라고 하면 되겠다"는 위험천만한 얘기까지 돌고 있습니다. 상당수 동물용 의약품은 인체용 의약품과 성분이 동일합니다. 동물약을 사람이 복용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작용을 막고자 처방대상 동물용 의약품을 지정하고 수의사의 진단 및 처방 하에 사용하도록 한 것인데, 예외조항 때문에 무용지물이 돼버린 상황입니다.
수의사처방대상 동물용 의약품에는 동물에게 사용하는 마취제, 호르몬제도 포함돼 있습니다. 실제로 2014년에는 30대 남성 2명이 인터넷 조건만남 사이트에서 알게 된 사람의 주선으로 2 대 2 소개팅에 나갔다가 납치, 감금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건장한 성인 남성 2명이 술을 마신 후 갑자기 정신을 잃고 납치됐는데, 알고 보니 술에 동물용 마취제 '졸레틸'을 타서 정신을 잃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동물용 마취제를 일반인이 약국에서 구입하는 것이 합법이라 처리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는 졸레틸이 향정신성의약품(마약류)으로도 지정돼 있지만, 당시는 지정 전이라 약국에서 일반인에게 수의사 처방전 없이 판매해도 불법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동물용 의약품은 사람에게 악용 및 오남용될 여지가 많습니다. 약사법 예외조항이 없으면 이런 가능성은 0%가 됩니다. 수의사 처방전을 받아야만 해당 의약품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 의원의 지적에 대해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동물용 의약품을 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 있어 문제라는 말에 동의한다"고 답했습니다. 하루빨리 법 개정을 통해 이런 위험이 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이학범 수의사·데일리벳 대표
Copyright © 주간동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