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여전히 이런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감격, ‘클로즈 유어 아이즈’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00번째 레터는 1일 개봉한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입니다. 먼저, ‘그 영화 어때’ 뉴스레터가 100통을 맞이하기까지 꾸준히 읽어주시고 질책해주신 구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에 제가 수진이(저와 같이 ‘그 영화 어때’ 보내드리는 백수진 기자)한테 그랬거든요. “수진아, 설마 진짜 100번째일리가 없어. 틀림없이 내가 중간에 56번째를 65번째라고 썼든지, 67번째를 76번째라고 썼든지, 숫자를 건너뛰었을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100번째일리가 없어.”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정말로 건너뛰었을까봐 무서워서, 미루고미루다 두눈 질끈 감고 목록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맞더군요. 정말 100번째. 좁은 지면에 소개하지 못하는 영화를 독자들이 읽기 편하고 다가가기 쉽게 써보자, 독자와 소통 공간을 늘려보자는 생각에 첫 통을 보낸 게 작년 9월14일. 지금 보니 100통 중엔 횡설수설 잡담 같은 것도 섞였고, 이것저것 실험적 시도도 있는데, 구독자분들이 에구 쯧쯧 하시면서도 너그럽게 받아주셔서 100통에 이르렀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100번째 레터의 의미에 이보다 더 잘 맞을 수 없는 명작입니다. 올해도 많은 영화가 개봉했고 또 개봉을 기다리고 있지만,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독야청청합니다. 전 처음에 보고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이토록 고요하고 담담하게 심장을 가격하다니. 여기까지 읽으시면 ‘이거 또 무슨 엄청 졸리는 예술영화 아냐?’ 하실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영화 어때’는 영화광, 흔히 씨네필이라고 하는 열정적 팬들만 즐길 영화는 고르지 않습니다. 어쩌다 한 편 보는 분들이라도 마음을 열고 보신다면 충분히 감동을 담아가실 작품이라고 생각될 때만 보내드려요. 좀 길긴 합니다. 2시간49분. 흠흠. 네, 2시간 정도였으면 더 많은 분들이 좋아하셨을 거 같은데, 그거야 감독 의도라 어쩔 수 없… ^^;; 중요한 것은 고진감래. 영화가 끝날 무렵엔 거기까지 따라온 관객을 위한 값진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맞아, 이런 게 영화지’하는 반가움, ‘아직 누군가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있구나’하는 안도 같은 것이 동시에 밀려들면서 형언하기 힘들게 울컥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무슨 영화이기에 이렇게 서두가 긴가 하실텐데, 앞부분 줄거리를 약간 설명드리겠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느 가을날 프랑스 파리 외곽의 한 집을 보여줍니다. 유대인 랍비가 자기 딸을 찾아달라고 탐정을 불러요. 랍비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라면서 중국계 혼혈인 딸의 사진을 탐정에게 건네줍니다. ‘그 아이만이 나를 특별하게 봐준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 눈빛을 보고 싶다’고 하면서요. 사진을 받아들고 탐정이 집을 나서는데 여기서 멈추는 화면.
아하, 여기까지 보여준 건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주인공인 감독(미겔)이 만들다가 완성하지 못한 영화의 일부 장면이었습니다. 영화 속 영화를 잠시 보신 거죠. 그럼 미완성 영화를 왜 보여주느냐, 영화 속 영화에서 탐정 역할을 맡은 배우(훌리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거든요. 생사조차 불분명하고요. 그게 22년 전입니다. 감독은 22년이 지나서야 TV 프로그램 섭외를 계기로 뒤늦게 배우를 찾아나섭니다. 혹자는 그 배우가 바람둥이라 여자랑 달아났다고 하고, 혹자는 죽었을 거라고 하고, 설이 분분합니다. 그는 살아있을까요. 살아있더라도 찾을 수 있을까요.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추적극의 형식이지만, 이 영화는 추리 미스터리가 중요하진 않습니다. 저 위에 보신 영화 포스터 장면(소녀가 눈감고 있는 모습)이 엔딩 시퀀스에 나오는데요, 거기까지 마음을 열고 따라가시면 돼요. 영화 제목이 ‘눈을 감으세요’인데, 왜 눈을 감으라는 건지, 눈을 진짜 감긴 감았는지, 감았다면 누가 감았는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마지막에 발견하고 경험하시면서 여러분의 감상이 완성됩니다. 아니다, 그때부터 감상의 날개가 펼쳐지니까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보는게 맞으려나요.
자, 이 지점에서 이 영화를 만든 감독 빅토르 에리세(Victor Erice) 얘길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 영화는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 인생과 지독한 영화 사랑을 불어넣어서 만든 작품이라서요. ‘클로즈 유어 아이즈’ 보시고 나면 여러 질문이 생길 수 있는데, 해답의 열쇠를 위해 약간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빅토르 에리세는 스페인 감독인데, 올해 84세.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무려 31년 만에 발표한 신작입니다. 그러니 이번 영화 만들 때 얼마나 집념을 녹여냈겠습니까. 1973년에 선보인 장편 데뷔작이 ‘벌집의 정령’(The spirit of the beehive)인데, 이 데뷔작과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연결됩니다.
‘벌집의 정령’에서 주인공 소녀가 어느날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보는데 그 영화 속에서 괴물이 죽거든요, 왜 괴물이 죽었느냐고 소녀가 언니에게 캐물으니까 언니가 “괴물은 안 죽었다”면서 말해요. “영화는 가짜야, 괴물은 정령이고, 언제든 부를 수 있어, 눈을 감고 말을 걸면 돼.” 네, 맞습니다, 50년 전 데뷔작에서도, 이번 영화에서도 빅토르 에리세는 말합니다. “눈을 감으면 된다”고요. 눈을 감으면 죽은 괴물하고도 대화할 수 있고,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처럼) 잃어버렸던 자신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 단순하고 순수한 한 가지만 마음에 와닿으셔도 3시간 가까운 ‘클로즈 유어 아이즈’ 감상에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외 소소한 사실을 나열하자면 참 많은데, 빅토르 에리세는 실제로 만들던 영화가 미완성이 되면서 한이 맺힌 적이 있고, ‘벌집의 정령’에 나온 꼬마 소녀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실종된 배우의 딸로 나오고 등등, 참으로 일관된 영화 인생을 살아온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 저런 거 모르고 보셔도 상관없어요. 그냥 느끼실 수 있는 영화거든요.)
아마 ‘클로즈 유어 아이즈’ 자료를 찾으시면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언급이 많을텐데요, 만약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영화에 대한 영화’에 그친다면 여러분께 추천하지 않았을 거에요. ‘영화쟁이들이 영화 좋다고 만든 영화’라면 관객이 왜 거금 1만5천원을 내고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봐줘야 하겠습니까. 그건 영화 관계자들끼리 돌려보면 되죠.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빅토르 에리세라는 지독한 영화광, 영화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는 강력한 확신범이 만든 사랑의 결정체, 신념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영화라는 특정 장르를 넘어선 삶과 예술의 본질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다 사라졌다고, 잃어버렸다고 체념한 존재 혹은 의미를 다시 만날 수 있는가, 지나가버려 부질없어 보이는 재회와 회생의 시도는 의미가 있는가 등등의 여러 물음에 대한 답을, 관객 여러분 각자가 찾아보실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너무 길어 졸리시면 중간에 살짝 조셔도 됩니다. 학교 과제물 내는 것도 아닌데요. 단, 서두랑 엔딩은 꼭 챙기셔야 하지만요.
그렇게 알 듯 말 듯 뿌옇게 김서린 창문 너머 어슴푸레 들여다보듯 보시다보면 눈을 감아야 보이는 무언가를 만나시게 되는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 추천하면서 오늘은 여기에서 줄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영화 어때’ 구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늘 구독자분들을 가슴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영화를 골라 보내드리겠습니다. 101번째 레터로 인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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