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널리즘이 트럼프 당선 불렀다 [시민편집인의 눈]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사회 문제의 해법을 찾는 대신, 극단적 냉소와 환멸만 자극한 언론 보도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낳았다.” 솔루션 저널리즘 네트워크의 공동 대표인 데이비드 본스타인과 티나 로젠버그가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직후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의 요지다. 퓰리처상 등을 받은 저널리스트인 이들은 “뭐가 잘못됐는지 보여주기만 하면 사회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성 언론의 믿음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폭력, 부패, 무능과 같은 부정적 뉴스에 집중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두려움, 무력감, 절망감에 빠지면서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치인에게 이끌리기 쉽다는 얘기다.
본스타인과 로젠버그는 “언론이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와 병리 현상에 계속 초점을 맞춤으로써 트럼프가 퍼뜨리는 불만과 절망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게 했다”고 짚었다. 또 “오늘날은 뉴스 소스의 분열과 허위조작정보(fake news) 확산으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이 점진적인 체제 변화를 기대하는 대신 ‘기계 자체를 부숴버리는’ 변화를 갈망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2024년 11월 선거에서도 미국의 주류 언론 다수는 ‘민주주의와 소수자 인권을 위협하는 트럼프’에 관해 비판 보도를 쏟아냈다. 하지만 트럼프의 부자 감세와 복지 축소로 손해 볼 가능성이 큰 저학력 노동자를 포함해, 유권자의 반 이상이 이를 무시했다. 지금 미국 언론계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나’를 복기하는 분위기다.
사실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변수는 ‘장바구니 물가’를 포함해 훨씬 다양하다. 하지만 ‘저널리즘의 실패’를 짚는 미국 언론 일부의 자성에는 한국 언론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관심과 행동을 요구한다. 그런데 고통과 분노, 무력감, 절망을 유발하는 보도만으로 건강한 참여를 이끌 수 있을까. 본스타인 등이 인용한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 월드 서비스의 설문조사를 보면 35살 이하 응답자의 3분의 2는 ‘뉴스가 문제를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해결 방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길 원한다’고 답했다. 최근 미국·유럽의 일부 언론이 실험하고 있는 ‘솔루션(해법 지향) 저널리즘’ 혹은 ‘컨스트럭티브(건설적) 저널리즘’은 이런 기대에 발맞춘 시도다. 비판에 그치지 말고, 해결책도 열심히 찾아 알리자는 것이다.
대통령 부인의 개인 비리와 국정 개입 의혹,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한 대통령의 ‘자폭’ 회견까지 실시간 목도한 한국 유권자도 심정적으로 멀쩡하기가 어렵다. 대안세력이 되어야 할 야당 지도자는 금융투자소득세 등 정책 관련 소신을 득표 유불리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꾼다. 북한군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과 러시아 전선 파병 소식은 ‘이러다 혹시’ 하는 안보 불안을 자극한다. ‘악마의 바람’을 타고 번진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 등 기후재난은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는데,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가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한겨레를 포함한 국내 언론에도 이렇게 두려움, 분노, 무력감을 자극하는 뉴스가 넘친다.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고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보도는 많지 않다. 그래서 ‘속이라도 시원하게 풀어주는’ 유튜브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비비시 월드 서비스의 팟캐스트에는 일주일에 한번 방송되는 ‘해피팟’이 있다. 멸종위기 동물 보호 아이디어로 상금 17억원의 ‘어스샷’ 상을 받은 카자흐스탄 청년, 뇌종양의 새로운 진단법을 발견한 과학자들, 말라리아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집트 소식 등 희망적인 뉴스를 모아 들려주는 인기 코너다. 영국의 가디언과 프랑스 일간지 니스마탱 등은 기후위기와 지역문제 등의 해결책을 탐색하는 솔루션 저널리즘으로 열혈 구독자 증가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가디언 등의 보도는 국내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얄팍한 문제 제기와 구색용 해법 제시’와 다르다. 문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원인을 치밀하게 분석한 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나’에 집중한다. 각 대안의 한계도 짚어줌으로써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기여한다. 한국 언론도 이런 보도를 늘리면 좋겠다. 권력을 감시하고 불의를 비판하는 것은 여전히 저널리즘의 본분이지만, 희망과 대안도 함께 배달해주는 언론을 독자·시청자는 더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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