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삶에서 초심을 잃는 순간
필자가 독일에서 유학했을 당시의 일화이다.
독일에서 유학생으로 산다는 건 외국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쉽지 않은 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필자 역시 서투른 문화와 언어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차에 마지막 생을 마감하는 호스피스 병동의 느낌을 주는 요양원에서 연주를 매주 맡게 됐다.
요양원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곳으로 거주하는 모든 분들이 고령의 노인층이다. 허리가 굽고, 덜덜 떨리는 손과 발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얼굴에 온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분들의 모습이 처음에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독일인 특유의 진지함과 성실함으로 한 평생 살아온 그들인 만큼 느껴지는 삶의 무게는 생각해 보니 무척이나 중했던 것 같다.
그 시절, 아직은 삶의 연륜도 부족하고, 특히 음악이 아직 설익었던 학생이었던 나는 그곳에서의 음악연주를 통해 다달이 받을 월급에 꽤 관심이 있었다. 한 달 치 방세를 해결하고도 남을 넉넉한 보수를 받으며 내가 하는 일은 간단한 반주와 식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연주가 다였다. 이렇게 간단히 한 달 방세가 해결되는 꿀알바가 어디 있으랴! 초기에는 두근거림을 가득 안고 이 곡 저 곡 악보를 바닥에 펼쳐 놓고는 어떤 곡을 연주할까 고민하며 곡을 선정하고, 열심히 연습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연주가 끝나면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마음을 읽을 수 없는 냉담한 얼굴과 힘없는 손으로 치는 텅 빈 박수 소리가 전부였다.
1회, 2회, 3회…. 회차가 늘어 몇 개월이 흐른 어느 순간, 이제는 더 이상 어떤 곡을 연주할지 정하지 않았고 나름 야심 차게 악기에 앉아 일명 즉흥연주로 마지막 곡을 연주하는 대담함을 가지게 됐다. 이제 제법 독일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연주 기량도 많이 성장해 나름 기고만장한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도 나의 준비 않음을 눈치채지 못했고 늘 그러하듯 오늘 연주도 너무 좋았다, 감사하다 등의 형식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점점 대담함이 무모함으로 바뀌며 모든 곡들을 즉흥으로 말도 안 되는 화성과 멜로디의 전개로 그분들을 농락했다. 그러고는 돌아오는 찬사에 가볍게 웃음 지으며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 또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당신들이 무엇을 알겠냐며 혼자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엉망으로 즉흥연주를 마쳤다. 아무 생각 없이 가방을 챙기던 나에게 곱게 치장하신 할머니 한 분이 떨리는 발걸음을 지팡이에 의지한 체 천천히 다가오셨다. 거의 1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말씀을 나누어 보지 못한 분이셨는데 그분이 나를 부르셨다.
깜짝 놀라 무슨 일인지 묻는 나에게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채로 내 두 손을 꽉 잡고 "오늘 너의 음악이 내 마음을 적셨단다. 우리는 너의 음악을 너무 사랑하고 네가 이곳에 와 주어 매주 얼마나 기다리고 감사한 마음인지 꼭 말해주고 싶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순간, 나는 누가 뒤통수를 한 대 친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내 맘대로 말도 안 되게 악보도 없이, 연습도 없이 막 연주했는데 이 음악이 누군가의 마음을 적셨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더욱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다음 주에 어르신이 조용히 주무시며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생존에 마지막 들은 라이브 음악이 나의 연주라니.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잘 연습하고 준비했을 것을….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전문 연주자가 된 지금, 필자는 그때의 작은 에피소드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작은 잔재주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나의 음악을 듣는 이가 1명이라도 있다면 늘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이든지 초심을 잃지 않고 매사 겸손히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삶의 지혜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당신의 초심은 어떠하며 지금은 어떠한지 익어가는 가을 하늘을 보며 생각해 보자. 이수정 남서울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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