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에 익숙해지면 지옥은 계속된다 [프리스타일]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기자들끼리는 '번호가 오염됐다'는 표현을 종종 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오염에 익숙해졌다.
문제는 오염에 익숙해질수록 피해자를 탓하는 정서가 강해진다는 점이다.
오염에 익숙해지면 지옥은 계속된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자들끼리는 ‘번호가 오염됐다’는 표현을 종종 쓴다. 수시로 걸려오는 국제전화, 각종 스팸 메일과 피싱 메시지, 타깃형 광고로 점철된 소셜미디어(SNS)와 끊임없이 안부를 물으며 데이트를 하자(?)는 텔레그램 가짜 계정까지. 취재용으로 사용 중인 ‘서브 폰’은 더하다. 사채업자를 취재할 당시 번호가 퍼진 모양인지, 수시로 급전을 빌려줄 수 있다며 안내한다. 누군가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애인이 필요하거나, 돈이 없거나, 또는 돈이 너무 많아 지식산업센터와 생활형 숙박시설 분양을 받아줄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이렇게 오염된 통신 환경에 면역이 생긴 걸까. 얼마 전에는 검찰을 사칭하는 보이스 피싱 전화에 “아, ○○○ 검사님 잘 알죠. 형 동생 하는 사이입니다”라고 힘빠진 목소리를 건넸다. 상대방은 한숨을 내쉬곤 전화를 끊었다.
온라인 환경에 기반을 둔 사기는 엄벌이 쉽지 않다. 이미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대개 이들 범죄에 동원되는 서버는 해외에 있다. 우리는 지뢰로 가득한 통신 환경을 어느새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수사 당국의 캠페인도 ‘속지 마세요’를 최대한 알리는 쪽으로 향한다.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사기 피해를 입은 뒤 이를 적발해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과정 자체가 고역이다. 10월1일 정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로부터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경찰 내 사이버팀 인력은 2020년 1360명에서 2024년 8월 7105명으로 5.2배 증가했다. 그러나 온라인 사기 사건에 대한 검거율은 2020년 73%에서 2024년 8월 50.8%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인력을 늘려도 손쓰기 어려울 지경에 이른다.
애초에 사기당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인식이 일반론이 되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오염에 익숙해졌다. 오염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인식마저도 점점 희미해진다. 문제는 오염에 익숙해질수록 피해자를 탓하는 정서가 강해진다는 점이다. 사기 범죄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 중 하나는 쉽사리 빠져드는 ‘자책의 늪’이다. 피해자를 지탄하는 정서가 강해질수록, 신종 범죄에 대한 감응도와 문제의식은 떨어지고, 이는 새로운 유형의 온라인 사기가 초기에 발견되지 않는 결과로 이어진다. 오염에 익숙해지면 지옥은 계속된다. 비록 소용없어 보이더라도, 통신 환경을 오염시키는 이들에 대한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조치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김동인 기자 astoria@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