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천 칼럼] 우연한 슈퍼파워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 기조를 ‘국제주의’라고 한다. 국제주의는 미국이 주도적 리더십을 발휘해 국제 질서를 개편해 관리해야 한다는 외교 노선이다. 전후 미국은 유엔과 같은 제도와 다수의 동맹을 구축해 국제 안보 질서를, 브레턴우즈 체제로 불리는 국제통화 체제와 자유무역 질서를 확립해 국제경제 질서를 관리했다. 이러한 국제주의 외교는 민주·공화 양당의 초당적 지지를 받고 있었고 미국 국민 다수도 지지했으니 국가적 합의 사항이었다.
베트남전에서 낭패를 본 미국이 잠시 ‘고립주의’로 회귀한 적이 있다. 냉전이 끝난 후 팻 뷰캐넌과 같은 정치인이 ‘고립주의’ 외교를 주창하기도 했지만 극소수의 의견에 불과했다. 탈냉전 시기 미국 외교의 과도한 팽창을 지적하며 ‘자제(restraint)’를 설파한 ‘자제파’들의 주장이 득세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국제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생어가 지적했듯이 도널드 트럼프의 재당선과 함께 이제 미국 국제주의 외교는 종언을 고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고립주의 외교정책이다. 외교정책에서 고립주의란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발을 빼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미국이 주도적 역할로 국제 질서를 관리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미국도 지구상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선택적으로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편협하게 정의된 자국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도 증강하고 중국은 물론 필요에 따라 동맹도 때리겠다는 것이다.
2016년 미 대선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트럼프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중동에서 전쟁이 나 사람들이 치고받고 싸우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게 우리의 국익과 무슨 관계가 있나. 거기에 관여할 돈이 있으면 난 미국을 위해 쓸 것이다. 워싱턴의 엘리트들이 지지한 자유무역은 당신들의 직장을 앗아갔다. 내가 관세로 이를 다 찾아올 것이다.” 트럼프의 지지층은 이런 고립주의 외교에 열광한다.
문제는 이런 트럼프 지지가 더 확장·강화·고착됐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1933년 뉴딜 정책 때부터 든든한 우군이었던 저소득층, 노동자 계층을 이제 트럼프의 공화당에 완전히 빼앗겼다. 전통적 지지층이었던 청년층과 소수 인종도 이탈해 트럼프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미국 정당 지지층의 ‘재배열(realignment)’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정치적 지각 변동을 고려한다면 미국 우선주의는 이제 미국의 ‘뉴노멀’로 봐야 한다. 고립주의 외교 역시 이제 미국 외교의 뉴노멀이다. 미국이 국제 질서를 관리하는 그런 시대는 끝났다. 국제사회에 공공재를 제공하는 미국은 이제 없다. 이런 미국이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미국이다.
미국은 원래 고립주의 외교의 나라였다. 건국 초부터 고립주의 외교를 지향했고 1차 대전이 끝난 후 잠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국제주의를 표방했지만 바로 고립주의로 회귀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다시 유럽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지만 미국은 철저하게 방관으로 일관했다. 유럽의 안보 상황이 미국의 안보와 무관하다는 논리였다. 2차 대전이 발발한 후에도 미국의 즉각적 반응은 ‘중립’이었다. 전쟁 발발 2년 후 진주만 공습을 당한 후에야 전쟁을 선포한 나라가 미국이다. 그때도 고립주의자들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위원회를 만들어 전쟁 참여에 반대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이 위원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내후년이면 미국 건국 250주년이다. 250년의 미국 역사에서 2차 대전 이후 70년의 국제주의 외교는 예외적인 기간이었을지 모른다. 피터 자이한에 의하면 미국은 슈퍼 파워가 되려 할 의지나 전략이 없던 나라였다. 고립주의로도 잘 먹고 잘살던 나라였다. 양 대전을 겪고 나서야 고립주의로 방관하다가는 또 다른 세계대전이 터질 수 있다고 생각해 국제질서에 관여하게 됐다. 자이한의 말대로 미국은 “우연한(accidental) 슈퍼 파워”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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