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의시대정신] 소는 누가 키우나

2024. 11. 1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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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명문대생, 자퇴 후 창업할 때
한국선 의대 진학 위해 재수 선택
반도체·AI 열풍에도 쏠림 심해져
대한민국의 미래 생각하니 한숨

‘석사 위에 박사, 박사 위에 육사’란 우스갯말이 있었다. 1980년대 5공 시절 얘기다. 요즘엔 ‘석사 위에 박사, 박사 위에 중퇴’란 말이 돌아다닌다. 하버드 대학을 중퇴한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를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문사학 리드 칼리지를 한 학기 만에 그만둔 스티브 잡스도 있다. 일론 머스크는 스탠퍼드 대학원에 합격하고 등록하지 않아 제적됐다. 요즘 가장 핫한 중퇴자는 샘 올트먼이다. 스탠퍼드 대학을 중퇴한 그는 챗GPT를 선보이며 인공지능(AI) 산업의 게임체인저가 됐다. 이들에게 명문대 졸업장은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꿈의 실현을 지연시키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이들을 만든 건 졸업보다 창업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다. 심지어 중퇴자를 위한 장학금도 있다. 페이팔과 팔란티어의 공동창업자인 피터 틸은 대학 자퇴 및 창업을 조건으로 10만달러를 지원하는 ‘틸 펠로십’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수혜자가 암호화폐 이더리움의 아버지이자 올해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거론된 비탈릭 부테린이다. 지난해 경제지 포브스의 최대주주가 된 29세 억만장자 오스틴 러셀 역시 스탠퍼드를 중퇴하고 이 장학금을 기반으로 창업에 성공한 인물이다. 이들 때문에 실리콘밸리에는 “대학 졸업장을 땄다면 당신은 이미 실패자”란 농담까지 나왔다. 여기까지 미국의 이야기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한국에도 중퇴자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방향이 다르다. 미국 명문대생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창업 현장에 뛰어들 때 한국 명문대생들은 휴학계 또는 자퇴서를 내고 입시학원으로 달려간다. 최근 3년간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을 떠난 182명의 자퇴 사유는 ‘의대 진학’이다. 2021년 54명, 2022명 58명, 2023년 62명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올해 초 갑작스러운 의대 정원 확대 발표가 불을 질렀다. 올 2학기에 서울대 1학년 자연계열 학생 4명 중 1명이 휴학했다. 정원이 늘어난 의대 입시 도전을 위해 휴학한 학생이 상당수란 분석이다. 의대생들의 휴학과 자퇴 이유도 또 의대다. 지방대 의대에 합격한 뒤 수도권 의대에 재진입하기 위해 중도 이탈하는 이들이다.

생명을 살리는 의사라는 직업을 향한 꿈은 충분히 훌륭하며 존중받을 만하다. 다만 그 쏠림이 과하다. 목동, 대치동 학원가에는 ‘초등 의대 준비반’까지 등장했다. 열 살 남짓 아이들이 중·고교 과목을 선행해서 배우며 의대 입시를 준비한다. 이쯤 되면 섬뜩할 지경이다. 이를 막고자 ‘초등 의대반 방지법’까지 발의됐다. 아이러니한 건 이 법을 발의한 당의 대표가 딸을 의전원에 부정입학시켜 논란이 된 전직 법무부 장관이란 점이다. 한편에선 떠나간 전공의들로 의료 공백이 심화되고, 한편에선 몰려드는 의대 지망생들로 학원가가 미어터지는, ‘의대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전국 수석을 차지하고도 의대가 아닌 물리학과나 공학과에 진학했다는 1980∼1990년대 이야기는 낭만의 시대로 추억되며 인기 쇼트폼 영상으로 소비되고 있다.

1970∼1980년대 가파른 경제성장기에는 일명 ‘전화기’(전자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라 불리던 학과들이 대세였다. 취업보증수표로 불렸기 때문이다. 실용을 떠나 지적인 호기심과 순수한 열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도 많았다. 물리학과는 전국 수재들의 집합소였다. 1990년대에는 ‘제2의 빌 게이츠’를 꿈꾸는 학생들로 컴퓨터공학과가 부상했다. 의대의 인기는 대체로 높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대세 학과와 엎치락뒤치락하곤 했다.

그런데 점차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자연계 상위 20개 학과에서 의·치·한·약학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1990년 20%, 2000년 65%에서 2022년에는 100%가 됐다. 현재는 수도권에서 지방까지 모든 의대를 성적순으로 채우고 나서야 서울대 공대 지원이 시작된다. 반도체 붐이 일고 AI 열풍이 불고 생명과학, 우주공학의 대전환기라며 세계가 떠들썩해도 한국인의 의대 사랑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많은 상위권 학생들의 적성과 꿈이 모두 의사로 귀결될 리 없다는 점이다. 인재들을 모두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기형적인 사회 분위기가 개인의 꿈과 소신을 흔들고, 국가의 미래도 흔들고 있다. 팽창하는 ‘의대블랙홀’을 멈추지 않는 한 이미 악화된 기초 과학 분야의 기반은 더욱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AI, 클라우드, 빅데이터, 나노 등 첨단과학 분야의 인재 수급이 시급한 와중에 의대만 바라보는 나라를 만들고 있으니 도대체 ‘소는 누가 키우나’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미국 사회가 중퇴까지 부추기며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건 가장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시기에 단 몇 년, 몇 개월도 낭비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들라는 의미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기에 교실에서 벗어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꾸라는 응원이다. 그 귀한 시간을 온통 입시에 쏟아붓도록 몰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재는 정상이 아니다. 수능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50%를 늘린 의대 정원 4567명으로 치러지는 첫 수능이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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