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래 칼럼] 끝이 보이는 우크라戰, 한·러 관계 복원할 기회로
“우크라의 나토 가입에 대해 애매한 태도로 푸틴 자극했다”
트럼프 당선으로 휴전 여론 힘 실리고 러시아 관계 복원 계기 마련돼
외교는 사자의 용맹보다 여우의 교활함이 더 필요
러시아 푸틴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 바이든 대통령에 대해 논란을 빚는 대목이 있다. 2021년 말부터 당장에라도 전쟁이 터질 듯한 상황이었는데도 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용인하겠다는 듯한 제스처로 푸틴을 자극했느냐는 것이다. 바이든은 푸틴, 그리고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와의 회담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주권 국가의 선택 사항”이라며 나토의 동진(東進)을 멈추라는 푸틴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랬던 그가 2년 7개월여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지금에 와서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시기상조”라고 선을 긋는다.
1991년 소련 몰락 이후 본격화된 옛 소련 위성 국가들의 나토 가입은 유럽의 안보 지형에 직결되는 예민한 문제였다. 2014년 친서방 정책으로 러시아에 크림반도를 뺏겼던 우크라이나는 자국 안보와 러시아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토 가입을 추진했던 반면 푸틴은 같은 뿌리의 옛 소련 연방국이 서방 편에서 총부리를 겨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현재 전쟁이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과 러시아 쿠르스크 일대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소(獨蘇)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쿠르스크에서는 독·소 양국에서 340만명의 병력과 1만대의 전차가 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고 남쪽의 볼고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사상자가 200만명에 이르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가전이 전개됐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는 푸틴은 서방에게 나토의 동진 중단을 공식 보장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해왔다.
푸틴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그 전까지 사이가 좋았던 조지 부시 미 대통령에게 러시아가 나토에 가입하려는 조지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무덤덤하게 통보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푸틴의 호전성을 바이든은 왜 간과했을까? 트럼프도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바이든이 전쟁을 부추겼다”며 미국의 지원을 요구하는 젤렌스키를 “지구 최고의 세일즈맨”이라고 비꼬았다.
전쟁에 지친 유럽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회의론이 터져 나오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극우 세력은 물론 대(對)러시아 강경파였던 영국에서조차 기류 변화가 감지된다. 영국을 대표하는 매체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파병 직전 게재한 기사에서 서방과 젤렌스키가 전쟁에서 밀리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휴전을 촉구했다. 우크라이나가 독재자로부터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켰다는 데 의미를 두고 나토 가입을 조건으로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푸틴의 공격을 견뎌낸 정신 승리를 했으니 우크라이나 영토의 20%에 이르는 러시아 점령지는 포기하라는 것이다. 트럼프 측 휴전안은 향후 20년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배제하는 것으로 젤렌스키에게 더 불리하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으로 우리나라가 우크라이나 전쟁 속에 깊숙이 빠져드는 상황에서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3년 가까이 세계 경제를 짓눌렀던 식량·에너지 등 공급망 교란과 북러·북중 밀착으로 인한 동북아 안보 위기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다. 전쟁 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경제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러시아나, 미국 지원 없이는 전투 수행은 물론이고 공무원 월급이나 연금 지급 등 몇 개월도 버티기 힘든 우크라이나로서는 협상장에 나오라는 트럼프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우리도 러시아와의 관계 복원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수교한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긍정 평가가 90%를 넘을 정도로 한국을 좋아하는 나라다. 러시아와 교역 규모는 전쟁 전 연간 38조원 수준으로 치솟았다. 삼성·LG전자는 러시아의 국민 브랜드로, 오리온 초코파이는 최애 식품으로 추앙받았고 현대차 점유율은 30%에 달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재로 교역 규모는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 현지 진출 기업들의 손해도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명재상 비스마르크나 20세기 최고의 외교가 헨리 키신저는 그 어떤 이념이나 가치보다 국익을 우선했다. 지금이야말로 지도자에게는 사자의 용맹보다 여우의 교활함이 더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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