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원호]정권의 위기, 대한민국의 불행
시민사회와의 피드백 과정도 작동 안 돼 심각
5년 단임 대통령제 수명이 다한 건 아닌지…
사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과 취임 초기의 출발점에서 주었던 부푼 기대가 금방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그라지는 것을 우리는 되풀이하여 지켜보았다. 이것은 어쩌면 5년 단임제 대통령의 숙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통령이 겪는 정치적 위기는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심각한 것이라 단순한 정권의 위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불행이기도 하다.
첫째, 윤 정부 현재의 위기는 입법을 포기한 구조적 통치의 부재가 2년 반 동안 누적된 것이며, 단발적인 스캔들과 녹취파일들에 드러난 “처신”들은 이 문제에 비하면 차라리 사소하다. 예컨대, 윤석열 정부를 후세가 평가한다면 역대 정권 중에서 가장 허약한 정권이었다고 평가할 것이다. 2년 반이 지나도록 윤석열 정부의 ‘시그니처’라 할 만한 입법 성과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부 출범부터 국회에서 여당은 항상 소수였고, 심지어 지난 4월 총선 이후 상황이 더욱 악화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소야대가 전혀 새로운 현상도 아니며, 적어도 행정부가 국회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무엇인지를 찾으려는 노력은 했어야 하지 않는가.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 연금, 노동, 교육과 저출생의 “4+1 개혁”이 정말 시급하고 정부가 그것에 진심이라면 국회를 설득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는가. 한 가지를 주고 한 가지를 받는 것이 정치가 아니었던가.
진심으로 걱정되는 것은 이 설득의 역할이 대통령의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이다. 국회 개원식에 불참하고, 국회 시정연설이라는 권한을 포기하며, 야당 대표는 고사하고 여당 대표조차 만나기가 어려운 것을 보면 너무나 쉽게 국회와 입법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제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회의만 하지 말고 대통령령으로 손볼 수 있는 것들부터 빠르게” 바꾸라고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더 그렇다.
사실 의료, 연금, 노동, 교육, 저출생 등의 뿌리 깊고 심각한 문제들을 입법이 아닌 시행령의 수준에서 다루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 사회의 모든 해묵은 갈등과 모순이 중첩된 저 ‘4+1’의 문제들을 국회에서 논의하지도 않고 행정부 독자적으로 “빠르게 손보려는” 무모함이다. 그런 섣부른 시도 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의 의료 대란이 아닌가. 임기 후반부에는 개혁 과제들을 국회와 같이 신중하게 논의하여 윤 정부의 레거시로 남을 수 있는 입법의 토대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기 내 성과를 바라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고, 섣불리 실패할 거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낫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둘째, 역대 정부들에서 볼 수 없었던 현 정부의 다른 문제 하나는 시민사회와의 피드백 과정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대통령이 가장 즐겨 쓰는 비유, “선수는 전광판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응축되어 있을 것이다.
야구 경기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혜인지도 모르겠다. 투수가 전광판에 찍히는 구속을 의식하면서 공을 뿌리다 보면 예기치 않게 어깨에 무리한 힘이 들어갈 수도 있고, 스코어에 신경을 쓰다 보면 타자의 스윙이 턱없이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코치는 투수들의 구속과 어깨를 세심하게 살피고, 감독은 스코어를 보면서 오늘의 경기를 승리로 이끌 작전을 고심하고, 구단주는 시즌 우승의 큰 그림을 짜야 하지 않나. 다시 말해, 적어도 대통령이라면 밤잠을 설치면서라도 전광판을 뚫어지게 봐야 하지 않나.
예전 정부들도 ‘소통의 부재’라는 비판은 늘 받아 왔다. 그러나 이번 정부처럼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이를 ‘뚝심’으로 홍보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것처럼 반개혁 세력들이 저항하고 언론은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국민의 80%라는 숫자가 전광판에 찍혔다면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작전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훌륭한 감독일수록 지는 경기는 빨리 포기하고 다음 경기를 준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와의 단절, 시민사회와 언론 피드백 과정의 붕괴, 이 두 가지 문제는 우리가 5년 단임제 대통령제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유산은 5년 단임제 대통령제가 한국에서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 사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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