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냐 적이냐 이분법 넘어… 상호발전시키는 경쟁 ‘아곤’의 힘[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웅변-예술-정치 등 경쟁 통해
맞수를 완성시키는 생산적 역할
상호견제로 사회적 균형 이뤄
진짜 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우정은 철학자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늘 나누는 일상적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진짜 친구는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고민을 들어주면서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친구의 불행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며 몰래 웃는 사람도 없지 않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행위를 독일 말로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한다. 반면 니체는 동정과 연민은 낮은 의식 수준의 동물도 가질 수 있다면서, 소리 내어 크게 울어준다고 해서 좋은 친구가 아니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고 강조한다.》
적과 동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은 고대부터 있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정의는 친구에게 이롭게 하고 적에게 해롭게 하는 탁월함’이라고 밝힌다. 우정을 고집하면 할수록 적과 동지의 이분법은 더욱 확고해진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에게 집착할수록 대립하는 적이 많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오랜 이분법을 깨는 해법을 우리는 그리스의 경쟁 원리인 ‘아곤(agon)’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중요한 점은 아곤에서 시기심과 질투가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경쟁은 끔찍한 전쟁을 가져오는 파괴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웃과의 경쟁을 촉발하는 생산적인 역할도 한다. 그리스인은 질투와 증오, 시기심이 경쟁의 동기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선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시기심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적용될 뿐 신과의 관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시기심에 불타는 인간이라도 절대로 ‘신들과 경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명예, 부, 영광,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그리스인은 ‘신의 시기적인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오만(Hybris)’이 불러올 신의 시기심과 분노가 자신의 파멸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신이 지배하는 운명의 무상함 앞에서 그리스인은 겸허했다. 자신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승리의 순간에도 신 앞에서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둘째, 경쟁은 반드시 대적할 두 사람 이상을 전제하기 때문에 승자 한 명이 오랫동안 자리를 독점하면 안 된다. 니체에 따르면 한 사람만이 최강자가 되면 ‘경쟁이 말라서 고갈되고, 헬레니즘 국가의 영원한 생명 근거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헤르모도르를 추방한 에페수스 사람들의 ‘패각(貝殼)추방(Ostrakismos)’의 의미에 주목한다. 이는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 조각에 적게 하는 방식이었기에 도편 추방제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패각추방을 통해 지나치게 뛰어난 개인을 제거하는 이유는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생산적인 경쟁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한 사람만이 오랫동안 경쟁에서 독점적인 우위를 가져서는 안 되며, 그의 지위는 다른 뛰어난 사람과의 경쟁을 통해 제한되어야 한다(니체는 이러한 점에서 바그너라는 유일한 천재를 견제할 수 있는 두 번째 천재로 자신을 꼽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의 상호 경쟁과 상호 견제를 통해 그리스 문화가 균형(중용)을 잡아간다고 본 것이다.
경쟁, 시기, 투쟁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최고의 힘의 원천이다. 인간의 질투, 이기심이 그리스인의 모든 재능이 싸우면서도 꽃으로 피어나는 데 긍정적인 동기 부여가 된다. ‘보아라, 내 위대한 경쟁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그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열정에서 모든 경쟁이 시작된다. 이러한 치열한 아곤을 통해 위대한 시인, 소피스트, 웅변가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하는 명예욕이 없다면 그리스인과 그리스 국가는 타락하고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경쟁이 사라진다면 위대한 인물의 훌륭한 업적과 행복뿐만 아니라 개인과 국가는 모두 멸망하고 만다. 마치 경쟁자가 없는 사람이 자신의 승리에 취해 오만함을 갖다가 신의 시기심을 불러와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셋째, 적은 없고 맞수만이 있다. 친구 안에 잠재된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도록 돕기 위해 ‘아곤’이라는 그리스의 경쟁의 원칙이 필요하다. 이러한 경쟁을 통해 자신을 완성해 갈 때 친구와 적이라는 고정된 이분법의 구분이 사라진다. 적과 동지를 구분 짓는 적대(안타곤·antagon) 대신 아곤(agon)을 통한 상생을 찾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스의 아곤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적자생존의 무한경쟁과는 다르다. 함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승리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어야 한다. 훌륭한 우정의 덕목은 남의 불행을 즐기거나 남의 행복을 시샘 내는 데 있지 않다. 진짜 우정이 확인되는 순간은 내가 성공할 때이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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