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대통령 사과가 개운치 않은 이유

강필희 기자 2024. 11. 11.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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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화 변명 넘어 아예 훈시, 고개 숙인 진정성 의심받아
“불법 탈법 아니면 괜찮다”는 검사 화법으론 공감 못 얻어

2009년 8월 미국에서 도요타 자동차를 몰고 가던 일가족이 갑작스런 사고로 참변을 당했다. 가속페달 결함이 강력 의심되는 정황이 여럿 나왔으나 도요타는 운전 미숙을 탓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미국 연방정부가 나서 가속페달의 구조적 문제를 확인하고서야 사장이 뒤늦게 사과했지만 싸늘해진 여론을 되돌릴 순 없었다. 당시 1000만대라는 리콜 규모는 자동차 업계에선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도요타는 그때 훼손된 이미지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과는 타이밍이고 진정성이다.

지난 주 윤석열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을 통해 최근 제기된 일련의 의혹에 입장을 밝혔다. 장장 2시간 20분간 생중계된 회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대통령의 사죄 모습일 것이다. “모두 제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다. 진심으로 죄송하다. 앞으로는 그러는 일이 없게 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와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당일 여론이 일부 반영된 조사에서 국정지지율은 최저치를 또 경신하거나 횡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대통령의 작심 사과가 여론을 반전시키는데 실패한 이유는 뭘까.

조직이나 개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대개 다섯가지로 나뉜다. 사실을 부인하고 보는 전략, 변명하는 전략, 자신을 정당화하는 전략, 개선을 약속하는 전략, 사과하는 전략 등이다. 이 중에서 대중의 수용성이 제일 높은 전략은 당연히 ‘개선 약속’과 ‘사과’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의미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을 사용할 때 주의점이 있다. 절대 정당화나 변명을 섞지 말라는 것이다.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순간 사과 효과는 퇴색한다는 게 소통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대중이 원하는 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사과다.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대형 참사나 측근 비리가 터질 때마다 국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1번, 김영삼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도 9번이나 된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사과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차남 현철 씨가 한보 비리에 연루됐을 때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 “응분의 사법적 책임”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담화문을 읽었다. ‘사법 책임’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이 말잔치로 끝났으면 그저 그런 국면 전환용으로 잊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현철 씨는 아버지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 구속됐다.

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받은 26개 질문 중 14개가 ‘김건희’ ‘명태균’ 관련이었다. 여태껏 봐온 대통령 스타일상 ‘김건희 특검법 전격 수용’을 기대한 국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과를 받긴 받았는데 무슨 사과였는지 모르는 황당한 상황까진 상상하기 어려웠다. 대통령의 답변은 온통 부인(“여론조사 해달라고 한 적 없다”), 정당화(“일상적인 전화통화였다”), 변명(“도움 주려는 사람을 매정하게 끊지 못했다”)으로 점철됐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항변(“내 처를 악마화 한다. 가짜뉴스와 침소봉대에 억울함이 있다”)과 훈시(“공천 개입이라는 말의 정의를 따져봐야 한다”)로 나아갔다. 더 나쁜 건 대통령의 모든 사과에 ‘국민 마음이 불편하다면’ ‘잘못했다면’ ‘불법을 저질렀으면’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이 고개 숙인 기억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26년 검사 생활을 끝내고 정치 입문 9개월 만에 국가 최고위직에 오른 윤 대통령 언행에는 여전히 검사 윤석열의 DNA가 강하게 작동하는 듯하다. 수사기관 입장에서야 사과는 범죄 인정이고 기소의 근거다. 그래서 통상 형사재판에서 사과는 맨마지막으로 미룬다. 영어권 국가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절대로 “I am sorry”를 먼저 해선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정치인은 다르다. 사실관계를 법조문과 대조하며 불법 탈법 여부를 따지자는 건 검사의 말이지 대통령의 말이 아니다. 국민이 뽑지도 않은 대통령 배우자의 어이없는 처신이 21세기 대한민국을 아프리카 부족국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진정한 사과는 이런 분노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초기 윤 대통령이 검찰에서 국가정보원 댓글 작성 의혹 수사팀장을 맡았을 때 했던 발언이다. 검사 윤석열이 고집했던 공정과 상식은 대통령 윤석열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가치인가. 김건희 여사 관련 사과 타이밍은 여러 차례 놓쳤다. 진보는 물론 보수 언론조차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는데도 ‘어쨌든 사과’ ‘닥치고 사과’만 남기고 말았다. ‘요임금의 옷을 입고 요임금의 말을 하고 요임금의 행동을 하면 그가 요임금이다’. 맹자의 말이다. 임기가 절반이나 남았다. 대통령의 언어를 쓰는 바로 그 사람이 대통령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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