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반도체·배터리 등 퍼펙트스톰···美의 대중 봉쇄 강화를 기회 삼아야
40여년 전 레이건 내세운 ‘MAGA’로 트럼프 재집권
보편관세 부과, IRA·반도체법 보조금 축소 등 불리
중국에 60% 이상 관세 등 옥죄기 나서면 반사이익
“트럼프와 주고받기 필요, 기술 경쟁력 제고가 관건”
#198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는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세우며 민주당 소속인 지미 카터 대통령을 꺾었다. 당시 레이건은 미국이 경제 침체와 글로벌 영향력 약화에 직면했다고 지적하며 국가적 자긍심 고취를 강조했다. 신자유주의와 경제 성장, 반공에 초점을 맞춰 국정운영을 했다. 결국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세계 경제 패권에 도전하던 일본을 주저앉히며 글로벌 리더십 회복에 성공했다. 미국의 패권 경쟁국이던 소련이 1991년 말 해체된 것도 결국 레이건이 뿌린 씨앗의 결과였다.
내년 1월 20일 집권 2기를 시작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2016년 말 공화당 대선 후보 시절 레이건의 ‘마가’ 슬로건을 내세워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물리쳤다. 제조업 부활, 불법 이민자 차단, 미중 패권 전쟁 승리를 위한 강한 리더십을 내세웠다. 강력한 보호무역주의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운 것은 레이건과 달랐다. 분열을 마다하지 않는 공격적인 스타일도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이번 대선에서도 ‘마가’를 외치며 당선된 트럼프는 대선과 동시에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로 인해 더 힘 있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공화당은 대선에서 승리한 데다 상하원에서 모두 다수당을 차지해 ‘레드 스위프(Red Sweep)’를 달성했다. 특히 ‘트럼프 1기’ 때와 달리 공화당 내에서 반대파가 거의 없고 백악관·내각에도 충성파만 등용할 예정이어서 트럼프 재집권기에 독주가 예상된다.
트럼프는 스스로를 ‘관세맨(tariff man)’이라고 칭한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무역 적자 개선과 제조업 보호를 내세워 모든 수입품에 최소 10%, 중국산 수입품에 최소 6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렇게 되면 중국, 유럽연합(EU) 등도 미국산 수입품에 대한 보복 관세를 부과할 것으로 전망돼 글로벌 무역 전쟁이 불붙을 예정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반도체 등 첨단전략산업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더욱 죌 방침이다. 자연스레 첨단산업 분야의 공급망 분리가 가속화된다. 트럼프는 보편관세 부과라는 채찍과 함께 법인세 감세(21%→15%) 등의 당근책을 제시하며 해외 반도체·자동차·배터리 기업 등의 미국 현지 투자를 유치할 계획이다. 하지만 조 바이든 정부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칩스법)에 따라 시행하고 있는 첨단산업 공장 설립 보조금 혜택은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할 방침이다.
글로벌 무역 갈등이 심화되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에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 기업들이 대미 수출 가격을 낮추거나 미국에서 직접 제조하는 방안을 검토하게 되면서 국내 일자리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는 지난해 445억 달러로 최고치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 3분기까지 399억 달러로 전체 무역수지 흑자(368억 달러)를 웃돌았다.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많은 유럽·일본·베트남 못지않게 우리가 트럼프 행정부의 표적으로 부상한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는 중국·한국·독일을 콕 짚어 거론하며 “다른 나라의 일자리와 공장을 빼앗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미국이 자유무역협정(FTA) 상대국인 우리에게도 보편적 관세 10~20%를 부과하면 대미 수출액 152억~304억 달러 감소 등으로 총수출액이 7%가량 쪼그라들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되면 국내총생산(GDP)도 0.4%가량 떨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트럼프가 물가 안정을 위해 석유와 가스 등 화석연료를 중시하는 점도 우리 기업에는 부담이다. 유가 안정이라는 득을 볼 수도 있으나 기업들로서는 그 이상으로 투자의 불확실성에 시달리게 된다. 청정에너지 사용 등을 촉진하는 IRA가 무력화되면 우리나라의 배터리·전기차·태양광 기업들은 보조금 수혜가 급감하게 된다. 이미 현대차그룹이 7조 원 이상 투자한 미국 전기차 신공장 메타플랜트에서 4800억 원의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최근 무산됐다.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도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여 현지에 투자한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타격도 커질 수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LG에너지솔루션 등은 바이든 정부의 보조금 지급 약속을 받고 현지에 공장을 짓거나 건설 중인데 보조금이 없어지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국내 기업들이 미국에서 받기로 한 보조금은 삼성전자 8조 9200억 원(약 64억 달러) 등 총 12조 원이 넘는다. 물론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 재집권 전에 미국에 투자한 삼성전자 등과 반도체 협약을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결과는 미지수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이 “IRA나 반도체법을 폐지하거나 상당 부분 개정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의회도 트럼프 편이다.
트럼프 2기에서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가 부과될 경우 우리 기업들은 대중국 중간재 수출 감소와 공급망 재조정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임성남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은 “기업들이 전자제품·자동차·배터리 등의 분야에서 중국산 부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급망을 재조정할 필요성이 커질 것”이라며 “대중 중간재와 중국 현지 생산분의 급격한 수출 위축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트럼프 2기’가 우리에게 잿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중국에 대한 전방위적인 옥죄기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 기업들은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경쟁력 유지를 위한 시간을 벌 수 있고 대미 수출에서 중국산 대비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태양광·풍력 등 중국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분야에서도 만회할 기회를 찾을 수 있다. 철강·알루미늄 등 중국의 덤핑 수출에 대한 미국의 제재 강화도 우리에게 유리한 점으로 꼽힌다. 트럼프가 인공지능(AI) 등 전력 수요 급증에 대비해 원전과 소형모듈원전(SMR)에 우호적이라는 점에서 국내 원전 수출 과정에서 미국과의 협력이 커질 수 있다. 우리 기업이 미국과 유럽 등에서 중국 기업에 비해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될 확률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2기 경제·안보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위기)이 급속도로 밀려오고 있으나 민관정이 함께 총력전을 벌이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트럼프: 거래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트럼프의 특성에 맞춰 미국산 가스 등의 수입과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확대를 통해 우리에 대한 무역·통상 제재를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특히 여야 정치권이 주 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이나 보조금 지급 등을 담은 반도체특별법, 원전 르네상스를 위한 원전산업지원특별법 등을 조속히 처리해 전략산업 지원을 뒷받침해야 한다.
연구개발(R&D) 퍼스트무버 체제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가 산학연 지원을 확대하는 것도 긴요하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트럼프의 대중 봉쇄 정책은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준 셈”이라며 “반도체를 핵심 부품으로 하는 전방산업의 탈중국화를 준비하고 전기차·배터리 분야의 경쟁력을 확보한다면 외려 성장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주영섭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는 “미국의 대중 견제로 전기차·배터리·로봇·태양광 등에서 단기적으로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며 “중장기적 차원에서 미중 패권 전쟁을 기회로 삼으려면 글로벌 기술 경쟁력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광본 논설위원·선임기자 kbgo@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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