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셀 화재 참사, 113년 전 ‘보스턴의 비극’과 꼭 닮아”
‘소방의 역사’(부키 펴냄).
올해로 소방관 경력 19년인 송병준 인천소방본부 소속 소방관이 최근 출간한 책이다. 7백쪽이 넘는 이 책은 8부로 나눠 인류가 화재 진화를 위해 역사 속에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세세히 다뤘다. 이산화탄소·할론과 같은 소화약제, 소방펌프와 소화기 등 소화기구, 소방차, 스프링클러, 경보·피난 설비 등 주로 화재진압용 물질과 도구들이 생겨나고 진화한 과정과 맥락을 지루하지 않게 찬찬히 풀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저자는 자신의 책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집필을 위해 외국 자료를 많이 봤는데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제 책처럼 소방의 기술적 측면 모두를 포괄한 책은 보지 못했어요. 스프링클러와 같이 개별 도구를 집대성한 책은 있지만요. 이 분야 세계 최초의 책을 썼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주변 권유로 시험을 치르고 소방관이 되었다는 저자는 발명가이기도 하다. 소방관이 된 뒤 발명 특허 3개를 출원해 2개를 등록했다. 모두 화재 진압이나 인명 구조에 도움이 될 길을 찾다 발명으로 이어졌다. “발명품 중 하나는 실내 천장의 화재감지기에 삽입해 스마트폰 통신이 가능하도록 하는 장치이죠. 스마트폰으로 화재 경보는 물론 피난 경로도 제공할 수 있어요.”
그는 이런 발명 열정이 책 저술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발명하려면 기존 물건들의 기능과 목적 하나하나를 뜯어봐야 하잖아요. 그 공부가 책의 토대가 되었죠.”
소방 기술적 측면 모두 포괄
“세계 최초의 책 썼다고 자부”
관련 특허 2개 등록한 발명가에
소방학교서 신입들 3년간 강의도
현재 인천 을왕리해수욕장을 관할하는 119안전센터에서 주로 수난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저자가 3년 걸려 쓴 이 책은 소방의 시선으로 본 인류의 작은 역사라고 할 만하다.
건축물의 5분의 4를 태운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소방펌프로 불을 끄는 전문 소방대가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의 주요한 불 끄기 도구는 양동이였다.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뉴욕 주민들은 조례 규정에 따라 해가 지기 전까지 집집마다 가죽 양동이 세 개에 물을 채워놓았단다. 인류의 ‘화재 진압 첫 발명품’은 기원전 200년께부터 쓰이기 시작한 주사기 모양의 ‘스쿼츠’이지만 용량이 작아 실전에서는 양동이에 대적할 수 없었다고 한다.
런던 대화재 직후 사람들이 직접 조작해 물을 품는 수동 소방펌프가 대중화하면서 소방의 역사는 한 단계 진화한다. 화가이자 공무원이었던 네덜란드 사람 얀 판 데르 헤이던의 소방호스 발명은 소방펌프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전에는 여러 사람이 열기와 낙하물의 위험을 참으며 펌프질을 해야 했지만 소방호스 등장 뒤에는 두세 명 정도만 펌프와 연결된 호스를 불 가까이 가져가면 되었다.
“소방호스 발명으로 사람들이 양동이로 물을 길어 와 펌프 수조에 채울 필요가 없어졌죠. 펌프의 흡인력으로 물을 끌어올 수 있으니까요. 또 전에는 실내에 물을 분사하기 어려웠지만 호스가 나오면서 어디든 바로 불 앞에 물을 뿌릴 수 있으니 소방호스는 인류 소방사에서 매우 혁신적인 발명품입니다.”
소방 기술의 혁신에도 대형 화재 참사는 여전하지 않으냐고 하자 송 소방관은 “소방 기술은 늘 희생자들이 나온 뒤에야 진화했다”면서 여기에는 “인류 특유의 낙천성”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새 기술이 나올 때 먼저 안전을 고려해야 하는데, 무조건 만들고 난 뒤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극복하려고 했어요. 석유를 쓰는 자동차나 선박 등의 내연기관이 대표적이죠. 석유가 타는 화재는 물로 끌 수 없어 뒤늦게 거품소화약제가 나와서야 대처할 수 있었죠. 요즘 많이 타는 전기차의 리튬배터리도 화재가 발생하면 진압이 곤란합니다. 진행속도가 빨라 제때 소방관이 대응하기 힘들고, 대다수 배터리의 경우 열폭주로 전해액이 기화하며 산소를 포함한 가연성 가스를 방출하기 때문에 질식소화가 어렵거든요.”
아리셀과 1911년 보스턴 화재 모두
이주민 피해 크고 퇴로에 물건 쌓아
“소방교육, 환경 변화 맞춰 개선해야”
그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기억이 필요한 화재 하나를 꼽아달라는 말에 1911년 미국 보스턴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화재’를 들었다. “146명이 죽었는데요. 대부분 여성 이주노동자였어요. 출구 부족으로 사망자가 많이 나왔죠. 퇴로에 물건이 많이 쌓여 밖으로 나갈 수 없었죠.” 그는 지금도 113년 전 보스턴의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했다. “지난 6월 화성 아리셀 화재도 복도로 나가는 출구 앞에 완제품이 쌓여 있어 대피가 힘들었어요. 피해자도 이주민이 많고요. 보스턴 화재와 판박이죠. 2018년 인천 세일전자 화재 역시 피난 경로에 유해 물질이 적재되어 있어 대피가 어려웠어요.”
그가 이번 책을 내는 데는 인천과 중앙소방학교에서 3년 동안 신입 소방관들에게 소방법 강의를 한 게 계기였다. 2019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하는 공공 에이치아르디(HRD) 콘테스트에서 ‘가상현실 기반 소방훈련’ 논문으로 3위 입상한 뒤 기관장 추천을 받아 소방학교 강단에 섰단다. “소방 법규에 실물 소방시설이 많이 나오더군요. 문자 위주 강의는 수강생에게 잘 안 다가갈 것 같아 강의 콘텐츠를 풍성하게 엮어 재밌게 가르치려고 자료를 많이 찾았어요. 그러면서 책 낼 생각을 했죠. 현재 국내에서 소방 관련 책은 에세이나 수험서뿐이거든요. 아울러 일반인도 책 내용을 알면 좋겠다는 생각에 최대한 쉽게 썼습니다.”
그는 화재 안전이 오로지 소방관이나 소방 산업 종사자에게만 맡겨지고 있는 게 우리 소방의 핵심 문제라는 말도 했다. “불이 나면 언론은 불법에만 초점을 맞추더군요. 화재 안전은 전적으로 소방 당국에 맡겨 버리고요. 일반인도 나는 (소방 안전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방심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스프링클러가 집에 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정상작동률은 50%도 안 됩니다. 일반인들도 당연히 스프링클러가 어디까지 날 보호할지 알아야죠.”
현시점에서 꼭 필요한 소방정책이 뭐냐는 질문에는 대국민 소방교육을 소방 환경 변화에 맞춰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8월 경기 부천 지역 화재 때 한 분이 안전매트에 떨어져 사망했는데요. 안전매트는 공기가 완전히 부푼 상태에서 접촉면을 넓게 하고 팔은 머리에 깍지를 끼고 떨어져야 해요. 저도 몇 번 떨어져 봤는데 위험한 장비입니다. 퇴로가 막혔을 때 정말 사망을 면하기 위한 최후의 장비이죠. 국민이 자신을 위해 그런 지식을 알 필요가 있어요.”
마지막으로 계획을 물었다. “노래방이나 단란주점 등 다중이용시설 안전관리를 다루는 법 개정의 계기가 된 화재를 추적해 써보려고요. 5, 6명 정도가 사망한 다중이용시설 화재는 대형 참사에 비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저는 이 희생자들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사망의 의의가 있지 않겠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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