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을 거부한 이유 [왜냐면]
이도흠
| 한양대 교수·윤석열정권퇴진운동본부 공동대표
내년 2월이면 정년퇴임이라 지난 10월18일에 학교 당국으로부터 정부포상을 신청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곧바로 “이 정권에서 훈장을 받는 것이 오히려 치욕일 듯하여 거부한다”라는 메일을 보내고 이어서 확인서를 제출하였다. 며칠 후 윤석열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촉구하는 ‘한양대 교수 시국선언문’을 써서 동참의 서명을 받았다.
종점에 와서야 지나온 길이 제대로 보인다. 선생은 ‘삶이 교과서’라는 교육관을 갖고 학문적 올바름, 정치적 올바름, 도덕적 올바름을 일치시키고자 수시로 수행하면서 좀 더 높은 진리에 오르고 좀 더 약자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 몸부림쳤지만, 돌아보면 이룬 것이 없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더 오염되고 타락한 세상을 물려주었고 이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연구년과 방학 때마다 했듯이 퇴임하자마자 암자로 들어가 소욕지족(少欲知足·욕심을 줄이며 만족함)의 삶을 살리라 생각했지만, 이기적 춘몽이다. 속세에 머물며 더러움과 탐욕을 덜어내는 것이 그동안 범한 죄업을 닦아내는 길이다.
세계를 바라보나 내 조국을 돌아보나, 제정신을 가진 지식인이라면 거의 매일 연민과 분노로 괴로운 시대다. 세계의 부조리는 끝을 모르고, 복합 위기가 인류의 미래를 지우고 있다. 불평등이 극대화하고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기술과 불로소득이 세계를 점점 기술 봉건체제로 퇴행시키고 있다. 2023년에 80억명 모두가 먹고 남을 정도로 식량이 생산되었음에도, 7억3300만명이 굶주렸고 그들 중 900만명이 사망하였다. 1500억달러를 10년만 투여하면 전 세계에서 굶주림을 영원히 몰아낼 수 있는데, 미국 시민이 2023년 한해에 비만으로 허비한 비용만 4255억달러에 달한다. 가자지구에선 연일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기후 위기로 파국에 이르는 시점이 5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 한 나라도 파리협정대로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았다. 플랫폼에 이어 공공 영역·서비스까지 점유한 지대(rent)를 줄이거나 불평등을 대폭 완화한 정책을 취한 나라 또한 없다. 자본과 언론의 유착, 가짜 뉴스, 딥페이크, 반향실 효과와 확증편향으로 인하여 공론장이 붕괴한 상황에서 장기 침체와 이주노동의 문제까지 겹치면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극우 포퓰리즘이 곳곳에서 발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으로서 구조적 폭력에 맞서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분노를 하면서 위기 극복의 담론을 생산해야 했는데, 시대적 책임을 방기하였다.
어디 가든 자연이 아름답고 참 정도 많으며 서민들도 대의를 중시하던 한국 사회가 빠르게 변하였다. 1970년대만 해도 까치밥을 남겨두고 개다리소반을 걸어두었다가 거지에게 밥상을 차려주었으며, 품앗이와 두레를 행하고 서울에 골목 문화가 남아 있었다. 그러던 사람들이 오히려 세계 최고로 화폐 증식의 욕망을 추구하고 타인에게 무관심하거나 인색해졌다. 얼마나 살기 어려우면 10만명에 25.2명이 자발적으로 삶을 마감하고 남녀 둘이 합쳐서 0.72명만 아이를 낳겠는가. 나는 ‘헬조선’을 만든 공범이다.
설상가상으로 윤석열 정권이 이 나라를 정치와 민주주의, 경제, 사회문화, 외교와 안보, 노동, 보건과 복지, 안전,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군사독재 시대로 퇴행시켰다. 게다가 김건희와 주변인에 의한 국정농단이 이미 선을 넘었고 전쟁 위기까지 조장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 사유는 그의 부인이 잘 안다. 어디 하나 잘난 것도, 잘하는 것도 전혀 없지만 말 잘 들으니 데리고 산다고 했다. 이토록 빠른 시기에 나라를 이리도 속속들이 망침에도 국민의 말조차 추호도 듣지 않는데 국민이 데리고 살 이유가 없다. 이렇게 무도한 반민족·반민주·반노동·반환경 극우 강성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것은 치욕이다. 노동자들과 백기완 선생이 지어준 ‘거리의 인문학자’나 ‘칼 든 선비’란 별명이 내게는 최고의 훈장이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2016년 촛불 이후에도 변화가 없고 윤석열 정권이란 반동을 맞은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와 기득권 카르텔이 온전하고 문재인 정권이 사회대개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윤석열 정권을 퇴진시켜야 하지만 그에서 그치지 않고 기득권 카르텔에 균열을 내는 사회대개혁을 하고 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 생태적이고 참여 민주적인 공유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는 것이 인생 이모작을 제대로 하는 일이리라. 어두울수록 별은 더욱 맑게 반짝이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하는 벗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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