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제주CBS 박정섭 기자 2024. 11. 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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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⑬]
편집자 주
제주CBS는 광복 79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의 구국운동을 소개한다. 이준 열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법률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취임했지만 윗사람들의 비행을 탄핵하다 면관됐다.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후 구국운동을 펼쳤다. 광복은 선열들의 뜨거운 독립운동을 통해 이뤄졌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양재 선생의 기고를 통해 이준 열사가 펼쳤던 독립운동과 이 시대 광복의 의미를 찾아본다.
이동휘. 양영재 선생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②이준 열사, 서재필과 입헌정치·공화정 추구
③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④게일 목사와 국민교육회 동지들
⑤동기동창이자 절친 함태영 목사
⑥황성기독교청년회 최대 후원자 민영환
⑦대를 이은 독립항쟁 동지
⑧대를 물린 동지 이범진과 이위종
⑨국채보상운동 주역 서상돈·김광제·양기탁
⑩이준 열사 그리고 안중근
⑪박용만 이승만 정순만
⑫이일정 여사
⑬이동휘
(계속)

이동휘(1873~1935)는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재 가문은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이동휘의 두 딸과 두 사위도 독립유공자다.

이동휘는 1896년 이용익의 소개로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했고, 1897년 졸업 후에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1901년 참령(소령)으로 승진한다. 1902년에는 민영환 이준 이용익이 조직한 비밀결사 조직 '개혁당'에 가입한다. 개혁당에서 성재는 이상재 박은식 노백린 남궁억 양기탁 장지연과 함께 활동했다.

1903년 5월에는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강화에 부임한 후 그는 전도사 김우제를 통해 감리교 신자가 된다. '기독교를 통해 기울어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미국인 선교사 벙커(D. A. Bunker)와 박능일이 운영하던 잠무의숙(岑茂義塾)이 있었다. 1903년 11월 이동휘는 잠무의숙을 바탕으로 강화도 최초의 근대 사립학교인 '합일학교'(合一學校)를 설립한다.

1905년 성재는 학생들과 경운궁(덕수궁)에 가서 고종을 알현하고 '보창학교'(普昌學校)라는 교명과 왕실 보조금을 하사받았다. 이동휘의 보창학교는 이준의 보광학교, 이종호의 보성학교와 함께 근대 교육의 '삼보'(三寶)라고 불렸다. 강화에만 14개 보창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공부한 학생만 800여 명에 달했다. 한때 강화도 학교 수는 72개에 이르기도 했다.

1905년 3월 3일 이동휘는 강화도 진위대장직을 그만둔다. 1906년 4월에는 '대한자강회' 강화도지부를 만들었고, 같은 해 10월 성재는 이준 안창호 이원긍 김정식 유승겸과 함께 '국민교육회'에 참여했다. 1904년 연동교회 게일(J. S. Gale) 목사 집에서 창립한 국민교육회는 학교 설립과 교과서 편찬, 책과 잡지 출판, 강연 활동을 벌였다.

1907년 3월 성재는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고,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강화도에서도 진위대 출신 김동수, 연기우, 지홍윤이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는 이동휘를 배후 조종자로 체포하고, 대무의도에 유배된 이동휘는 선교사 벙커의 노력으로 그해 12월에 풀려났다. 일제는 강화도 보창학교를 접수하여 작전본부로 활용했고, 설립 12년 만에 보창학교는 폐교된다.

이동휘는 1908년 8월부터 1909년 5월까지 전도사와 함께 책을 파는 '매서인'(賣書人)으로 활동했다. 성재는 함경북도 지역을 돌며 선교와 강연을 했다. "삼천리 강산 1리마다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3천 개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날이 독립되는 날이다." 그 덕분에 성경이 보급되고 한글이 널리 알려졌다.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성재는 북간도와 연해주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1911년 이동휘는 북간도 전도총회를 개최했다. 성재와 함께 활동한 김약연과 정재면은 명동촌에 '명동학교'를 세워 학생을 가르쳤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이 명동학교를 다녔다. 성재는 북간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항일 비밀결사체인 '광복단'을 조직한다.

1911년 7월 국내에 잠입한 이동휘는 신민회 활동과 105인 사건으로 인천 앞바다 무의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1912년 성재는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일제 탄압으로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낀 그는 1913년 2~3월 북간도 연길현 용정 명동촌으로 망명한다. 이동휘는 북간도를 기반으로 광성학교, 길성여학교, 배영학교, 종명학교를 세웠다. 독립투사 양성을 위한 동림무관학교와 밀산무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17년 1월 이동휘는 러시아 감옥에서 함께 투옥된 볼셰비키를 통해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다. 감옥에서 성재는 <공산당 선언>, <유물론>을 탐독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1918년 4월 28일 성재는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김립 오성묵 오와실리 이인섭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위원장으로 뽑혔다.

한인사회당은 그 뒤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명되나 이동휘가 이 당을 만든 것은 단순히 한국 독립 후원자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동휘는 열렬한 반일민족운동자이지, 사회주의 이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큼 초기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공산당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 많았다.

한인사회당은 조선인 최초 사회주의 정당일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이다. 1918년 출범한 한인사회당은 1921년과 1922년 각각 창설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보다 더 빨리 탄생했다. 개혁파 조직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이 틀림없다"는 말처럼 개신교인이던 성재 이동휘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성재는 종교와 이념도 독립을 위한 '도구'로 믿었다. 이동휘에게 '독립'은 종교이자 이념이었다.

1919년 11월 3일 이동휘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초창기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였다. 이들 세 지도자는 모두 개신교인이었지만, 독립운동 노선은 상호간에 달랐다. 이승만은 '친미외교론'을,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을, 이동휘는 '무장투쟁론'을 펼쳤다. 이동휘는 오직 무기와 피로써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철혈주의(鐵血主義)'를 내세웠다. 이준의 아들 이용은 이동휘의 이러한 철혈주의에 따라 독립항쟁에 투신한다. 이동휘의 삶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독립항쟁의 연속이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요약해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독립투쟁을 했다.

▲ 글쓴이 이양재(69) 선생=독립운동가 이병식 선생의 증손자로 (재)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과 (사)한국고서협회 상임부회장으로 고서화감정가이다. 서지학과 회화사학자로 2009년부터 제주에 머물며 제주관련 고서도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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