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치 사장’의 쓸모 [저널리즘책무실]

이종규 기자 2024. 11. 1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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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개의 대통령 대담 방송이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 있다.

'대통령실을 가다'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지난해 11월 박민 사장이 취임한 뒤 한국방송의 저널리즘은 철저히 망가졌다.

충성에는 보답이 따른다는 확실한 신호를 줬으니, '파우치 사장'은 임기 내내 '충성을 다하는 대통령의 방송'을 만들기 위해 견마지로를 다할 것이다.

지난달 23일 박장범 앵커가 새 사장 후보로 임명 제청된 이후 한국방송 기자들의 반대 성명이 줄을 잇는 것은 이런 위기의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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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박장범 한국방송(KBS) 앵커가 진행한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 방송 장면. 한국방송 유튜브 갈무리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장면 1. 기자가 대통령에게 물었다. “야당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국정을 끌어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야당에서 대통령께 독재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2019년 5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을 맞아 한국방송(KBS)이 단독으로 진행한 ‘특집 대담―대통령에게 묻는다’에서 나온 질문이다. 대담 진행자는 한국방송 송현정 기자였다. ‘인사 검증 실패’와 같은, 대통령이 불편해할 만한 질문이 이어졌다. 대담은 생방송으로 진행됐다. 대담이 끝난 뒤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한국방송 시청자 게시판 등에 송 기자를 비난하는 글을 쏟아냈다. 반대로 야권에서는 “진짜 기자”라는 찬사가 나왔다.

#장면 2. 지난 2월 한국방송은 윤석열 대통령 신년 특별 대담을 내보냈다. 촬영 이후 사흘에 걸쳐 편집된 녹화 방송이었다. 제목도 다큐를 연상케 하는 ‘대통령실을 가다’였다. 대담에 앞서 윤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영상이 전파를 탔다. 대담 진행자는 박장범 앵커였다. 박 앵커가 당시 최대 관심사였던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사건과 관련해 준비한 질문은 이랬다. “최근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의 조그마한 백을 어떤 방문자가 김건희 여사를 만나서 그 앞에 놓고 가는 영상이 공개됐다. 이 영상을 본 국민들이 의전과 경호의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여당에서는 김 여사가 정치공작의 희생자가 됐다고 얘기한다. 동의하나.” 방송이 나간 뒤 언론계에선 ‘용산 조공 방송’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이 두개의 대통령 대담 방송이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 있다. 첫째, 현재 보수 진영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문재인 정부 시절 한국방송이 적어도 정권의 애완견처럼 굴지는 않았다. 둘째, 박민 사장 체제의 한국방송이야말로 권력의 푸들로 전락했다. 셋째, 현 정부와 여권은 공영방송을 관영방송 또는 국정홍보방송쯤으로 여긴다.

‘대통령실을 가다’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지난해 11월 박민 사장이 취임한 뒤 한국방송의 저널리즘은 철저히 망가졌다. ‘땡윤 방송’ ‘대한 늬우스’란 조롱이 늘 따라붙는 그 흑역사를 일일이 거론하지는 않겠다. 다만, 최근 나온 윤 대통령-명태균씨 통화 녹음 보도만 한번 짚어보자.

윤 대통령의 공천 개입 의혹을 뒷받침하는 육성이 처음 공개된 지난달 31일, 한국방송을 뺀 모든 지상파와 종편채널은 저녁 메인뉴스에서 이 사안을 첫 꼭지로 다뤘다. 그날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방송은 여덟번째 기사로 배치했다. 관련 기사 꼭지 수도 문화방송(MBC)과 에스비에스(SBS)가 11건, 제이티비시(JTBC)가 19건인 반면, 한국방송은 보수 종편인 티브이(TV)조선(5건)보다 적은 3건에 그쳤다. 대통령 부부가 연루된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려 안간힘을 썼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방송 내부에서도 ‘보도 참사’란 비판이 나왔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을 비롯한 보수 진영은 박민 사장이 취임한 이후 한국방송이 비로소 ‘정상화’됐다고 흡족해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편향적인 보도를 일삼았는데 지금은 공정해졌다는 것이다. 참으로 뻔뻔하다. 하기야 군사독재 시절 이래 ‘무릇 공영방송은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디엔에이(DNA)에 새겨진 이들에게 뭘 기대하겠나.

이런 점에서 여권이 ‘파우치 앵커’ 박장범을 박민의 후계자로 낙점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낯뜨거운 아부로 대통령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는데 왜 안 그렇겠나. 충성에는 보답이 따른다는 확실한 신호를 줬으니, ‘파우치 사장’은 임기 내내 ‘충성을 다하는 대통령의 방송’을 만들기 위해 견마지로를 다할 것이다. 시민의 자산인 한국방송은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지난달 23일 박장범 앵커가 새 사장 후보로 임명 제청된 이후 한국방송 기자들의 반대 성명이 줄을 잇는 것은 이런 위기의식을 잘 보여준다. ‘박장범 사퇴’를 촉구하는 기수별 릴레이 성명에 지금까지 495명이 이름을 올렸다. ‘파우치 사장’만큼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일 게다. 이런 외침이 윤 대통령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 요청서에서 박 후보자에 대해 “조직 내에서 신망을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방송 공정성과 독립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겸비했다”고도 했다. 헛웃음만 나온다. 윤 대통령에게 공정성과 독립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저널리즘책무실장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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