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무대 못 찾은 K뮤지컬의 곤혹 [뉴스룸에서]
서정민 | 문화스포츠부장
‘국뽕’이라 해도 좋다.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차오르는 요즘이다. 영화 ‘기생충’이 칸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4관왕을 휩쓴 걸 시작으로, 방탄소년단(BTS)이 빌보드 ‘핫 100’ 정상에 오르고,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 6관왕을 차지하더니, 급기야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이는 그저 개인의 영광에 그치지 않는다. 빼어난 작품은 저 혼자 나올 수 없다. 오랜 기간에 걸쳐 문화적 기반과 잠재력이 쌓이고 좋은 창작자들과 작품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체 수준이 올라가는 법이다. 그러니 몇몇의 빛나는 성과는 우리 문화계 전체의 기쁨이요, 다가올 또 다른 영광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음악, 영상 콘텐츠, 문학에 이어 또 하나 주목할 분야는 공연예술이다. 특히 대중적·산업적 성격이 강한 뮤지컬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음악과 춤을 즐기는 민족성 때문인지 한국 뮤지컬 시장은 크게 성장해왔다. 지난해 매출 규모는 사상 최대인 4590억원에 이르렀다. 이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브로드웨이의 20%를 넘는 수준이다. 하지만 ‘회전문 관객’으로 상징되는 좁은 관객층과 인구 절벽, 내수 시장의 한계 탓에 국외로 뻗어가지 않으면 성장이 멈출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도 짙다.
한국 뮤지컬은 오래전부터 국외 진출을 시도해왔다. ‘명성황후’는 1997년 최초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안중근 의사를 그린 ‘영웅’도 2011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다만 이들은 짧은 기간 일회성 공연에 그쳤다. 최근엔 현지 창작진과 결합해 본격 진출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단독 리드(총괄) 프로듀서를 맡아 제작한 ‘위대한 개츠비’는 지난 4월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했다. ‘원밀리언 클럽’(주당 매출액 100만달러 돌파)에 드는 등 흥행 성공에 힘입어 애초 11월까지였던 공연 기간을 내년 5월까지 연장했다. 강병원 라이브 대표가 제작한 ‘마리 퀴리’는 지난 6월부터 두달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영어 버전을 선보였다. 두 작품은 글로벌 관객들에게 친숙한 이야기로 만든 창작 뮤지컬이다.
더 나아가 우리 것을 주요하게 내세운 작품들도 국외 진출을 꾀하고 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시조를 ‘랩 배틀’ 하듯 겨루는 내용의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은 지난 4일 런던에서 영어 버전 쇼케이스를 선보였다.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 정식 공연을 펼치는 게 목표다. ‘위대한 개츠비’로 성공 경험을 쌓은 신 대표는 ‘일 테노레’의 국외 진출도 준비 중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조선 최초의 오페라 테너 이야기를 그린 창작 뮤지컬이다.
정부도 의지를 보이고 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6월 브로드웨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는 “한국 뮤지컬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며 지원을 다짐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이와 동떨어진 일이 벌어지곤 한다. ‘명성황후’와 ‘영웅’을 만든 에이콤의 창작 뮤지컬 ‘몽유도원도’는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2026년 8월 한달간 뉴욕 링컨 센터 공연을 확정했으나, 그 전에 먼저 한국에서 공연할 장소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 2026년 1~3월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대관 심사에서 떨어진 것이다.
‘몽유도원도’의 원작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도미 설화를 모티브로 한 최인훈의 동명 소설이다. 윤호진 에이콤 예술감독은 “우리만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을 해외에 알리고 싶은데, 한국 무대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뉴욕 공연도 무산될 처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더욱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는 ‘몽유도원도’를 제치고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 일본 배우가 일본어로 연기하는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기 때문이다. 윤 감독은 “국공립극장이라면 국내 창작 뮤지컬의 활로를 열어줘야지, 3·1절을 낀 기간에 꼭 일본 작품을 올려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술의전당은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우리 창작 뮤지컬이라고 덮어놓고 특혜를 줘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국공립극장이라면 장사가 얼마나 될지보다 우리 문화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우선하는 게 도리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문화는 저 혼자 크지 않는다.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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