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적 그림으로 결핍 치유한 고독한 예술가
파리 유학시절 누드 크로키
여성과 식물 이미지 배치한
'길례언니II' 등 대표작 52점
친필편지로 삶의 흔적 조명
고향 고흥서 12월 31일까지
"고독으로 미채된 삼림 속에 내가 꿈꾸는 예술의 전당을 짓기 위하여 나는 끊임없이 싸늘한 시간의 대리석을 쪼아야 했고 또 앞으로도 쪼아야 한다." 천경자 화백(1924~2005)이 1980년 수필집 '해뜨는 여자'에 남긴 글이다. 개인적인 불행과 시대적인 비극 속에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작품들은 총천연색으로 미학적인 하나의 전당(殿堂)이자 성전(聖殿)을 이룬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채색화와 드로잉 52점을 비롯해 개인전 도록 실물, 친필 엽서와 편지, 해외 체류 시절 사진 등 총 160여 점을 한자리에 집결시킨 귀한 전시다. 그의 생일(11월 11일)에 전남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린 '찬란한 전설,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선 천재 화가의 숭고한 여정을 재확인하려는 수백 명의 인파로 전시실 내부가 북적였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천 화백이 그린 한 여인이 관객과 눈을 맞춘다. 1982년 작 '길례언니Ⅱ'다. 흰 모자를 쓴 여성의 모자 챙 위로 세 마리의 나비가 지나가는데, 이 여성을 둘러싼 식물의 이미지는 천경자 화풍의 중추를 관찰하기에 더없이 적당하다. 천 화백이 그린 '길례'가 누구인가. 고흥보통학교 3년 선배 임길례 씨로, 훗날 소록도에서 간호사로 일한 인물이다. 천 화백이 재해석한 길례는 '구원의 상징이자 순수함, 아름다움의 총체'가 된다.
코너를 돌면, 천 화백의 역사적인 작품이 서서히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1955년 작 '정(靜)'으로, 상반신을 벗은 한 여성이 거대한 해바라기 아래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있는 그림이다. 반나체의 단발 여성은 좌측을 응시하면서 멀리서 벌어지는 일을 헤아리려 하는데, 그녀가 위치한 해바라기 안은 그녀를 감쌌기에 안온해 보인다. 캔버스에 배치한 색채의 마법은 그 옆에 놓인 1956년 작 '제주도 풍경'에서도 두드러진다. 당대의 색감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해서다.
사실 천 화백의 실제 삶은, 오늘날 그의 이름 위에 기름 붓듯 쏟아지는 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몸으로 전쟁을 경험했고, 여동생의 죽음, 이어 극도의 배고픔 속에서 청춘을 보냈다.
하지만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음으로써 개인의 비극을 예술가의 축제로 전환시켰다. 그 결과 초현실적 화풍으로 자기만의 화법을 이룩했는데, 대표 작품이 1969년 작 '언젠가 그날'과 1971년 작 '만선' 등이다. 결핍과 결여로 점철된 삶 속에서도 고독한 꿈을 꾸었고 숱한 실험적 기법과 소재로 당대 독보적인 작가로 올라섰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파리로 거처를 옮긴 후 그림도 이번 전시에서 놓쳐선 안 될 볼거리다. 1969년 작 '파리시절 유화 누드'가 대표적이다. 붉은 천을 두른 의자에 앉은 한 여인이 몸을 오른쪽으로 꼰 채 나체로 앉아 있다. 여성의 벗은 몸보다도 배경의 색감에 주목하게 되는데, 50년도 넘은 작품이라고 보기엔 대단히 현대적이다. 그 옆의 누드 크로키 석 점에선 선(線)에 관한 천경자만의 고독한 고찰이 눈에 띈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1978년 작 '탱고가 흐르는 황혼'이 아닐 수 없다.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이 자줏빛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 여인이 내뿜은 것으로 보이는 연기는 정면 허공의 꽃 한 송이와 춤을 추듯 어우러진다. 사실 이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녀가 1995년 출간한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을 이해해야 하는데, 여인의 신비한 담배연기는 한(恨)의 정서와 만난다고 책에 기술돼 있어서다.
천 화백은 생전에 '글을 가장 잘 쓰는 회화 작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그의 그림은, 단지 붓이 오간 흔적이 아니라 고뇌의 사유가 이미지화되는 예술적 전장이었다.
특히 소설가 박경리와 친분이 두터웠다. 이번 전시에는 박경리 작가가 천 화백에게 보낸 친필 편지도 놓여 있다. 그는 천 화백에게 보낸 네 장짜리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미소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슬퍼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어요." 두 거장의 교우는 매우 깊어서, 1963년 박 작가의 첫 단편집 '불신시대'의 표지를 그린 이가 바로 천 화백이다. '불신시대' 초판본도 이번 전시에서 확인 가능하다.
'천경자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100여 점의 자료는 천 화백울 이해하는 각각의 열쇠가 된다. 1952년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열렸던 천경자 개인전 안내장, 1970년대 서교동 시절의 천경자 사진, 1973년 8월 현대화랑 천경자 개인전 리플릿, 1978년 서교동 시절 천경자 사진 등이 총망라됐다. 이번 전시의 예술총감독은 천 화백의 차녀 수미타 김(본명 김정희)이 맡았다.
[고흥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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