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AI 인프라 경쟁시대, 한국이 나아갈 길
지난 5월 서울에서는 글로벌 인공지능(AI) 거버넌스의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주요국 정상들과 글로벌 기업 CEO들이 대거 참석한 AI 서울 정상회의에서 AI의 안전하고 책임 있는 발전을 위해 국제사회가 공동 노력할 것을 약속한 '서울 선언'이 채택됐다. 특히 AI 발전의 혜택이 특정 국가나 기업에 독점되지 않고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한국이 AI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국가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서울 선언'을 실현하는 일이 결코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AI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AI 인프라가 있다. AI 인프라를 지배하는 나라가 AI 시대를 지배할 것이라는 인식 하에 이미 많은 나라가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과 중국이다. 미국은 AI 컴퓨팅 능력의 70%를 장악하고 있지만 이러한 인프라 우위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우려 하에 중국 등 경쟁국에 대한 견제를 강화해 오고 있다. 그 결과 2024년 현재 최첨단 AI 반도체인 H100으로 컴퓨터 클러스터를 만든 지역이 전 세계에 9곳 밖에 없는데 그 중 8곳을 미국이 싹쓸이했다. 반면 중국도 AI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컴퓨팅 능력을 내년까지 50% 이상 확충하는 등 나름대로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사한 각국의 AI 정책을 보면, 미국과 중국 이외에도 대부분 국가들이 AI 인프라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AI 인프라 없이는 소버린(sovereign) AI, 즉 주권 기반 AI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AI 인프라는 AI의 개발과 활용에 드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기능을 한다. 달리 말해, 잘 발달된 AI 인프라가 없으면 높은 비용 때문에 활용이 위축되고 그에 따라 AI 산업 발전과 사회혁신이 지체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따라서 어느 나라든 독자적인 AI 산업이나 모델이 없더라도 AI 인프라를 우선적으로 구축하면 최소한 발전의 잠재력을 확보할 수 있다.
◇ AI 인프라의 시대
인프라는 한 사회의 공통 기반을 의미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프라를 가장 먼저 본격 구축한 나라는 로마였다. 요즘의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가도를 통해 유럽 전역을 연결했고 이를 통해 1000년 이상 서구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산업화 시대와 정보화 시대도 그 발전의 출발점은 인프라였다. 산업사회의 문을 연 것은 항만, 철도, 전신, 그리고 후에 도로 등 인프라였고, 정보화 시대는 인터넷 프로토콜과 초고속인터넷이 발전을 이끌었다.
한국이 1960년대 이후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과감한 인프라 투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보면, 그 자체가 철도, 전력, 도로, 산업공단 등 인프라 구축 계획임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말 한국이 일순간에 정보화 강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TDX 유선전화, 1990년대 초의 CDMA 모바일 네트워크, 그리고 1990년대 중반의 초고속인터넷 등 당시로서는 막대한 규모의 인프라 투자가 이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AI 시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감한 인프라 투자가 선행되지 않으면 민간투자 촉진이나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정보화 시대 이후 사회 전반의 연결성이 확대되고 복잡성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인프라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이미 우리 사회는 통신망이 잠시 멈추기만 해도 큰 혼란을 겪는다. 앞으로 AI 시대가 되면 컴퓨터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데이터들도 서로 연결되고, 이를 구현하는 로봇과 자율주행 자동차 등도 연결되기 때문에 인프라의 중단이 가져올 혼란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일 것이다. 그만큼 인프라 발전을 이끌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 AI 인프라의 구조
AI 인프라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크게 컴퓨팅 인프라, 데이터 인프라, 에너지 인프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컴퓨팅 인프라는 AI 시대의 두뇌 역할을 담당한다. AI 시대에는 막대한 연산 능력이 필요하며, 이는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IBM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AI 컴퓨팅 비용이 2023년에서 2025년 사이에 89%가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앤트로픽(Anthropic)의 CEO인 아모데이(Dario Amodei)는 2024년 11월 7일 인터뷰에서 최근 출시된 AI 훈련 비용은 1억달러 수준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가 차원의 컴퓨팅 인프라는 이러한 부담을 덜어주고, 더 많은 기업이 AI 개발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핵심 기반이 된다.
둘째, 데이터 인프라는 한 나라에 산재한 각종 데이터를 자원화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관련 비용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AI의 성능은 학습 데이터의 질과 양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현재 AI 개발 프로젝트에서 데이터를 준비하는 데만 전체 시간과 비용의 70~80%가 소요되는 실정이다. 이 비용을 낮추지 않고서는 AI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와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셋째, 친환경 에너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환경 조성도 필요하다. AI는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데 기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친환경 에너지 그리드를 조기에 확충하지 못하면 AI 기업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환경비용이 급증하여 AI 혁신이 저해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에너지 전송망의 확충도 중요한 과제다. 이미 우리는 에너지 전송망 문제로 반도체 생산설비 증설이 지연되는 문제를 겪고 있다. 미국도 AI 기업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자체 발전소 건립을 고려할 정도다. 친환경 국제 기준에 부합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는 에너지 전략을 세우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 AI 대전환의 새로운 모델
세계가 AI의 혜택을 공유하자는 '서울 선언'을 구현하려면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현재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는 방식은 크게 두 모델로 나눌 수 있다. 글로벌 기업에 의존하는 미국식 모델과 국가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중국식 모델이다. 개도국의 입장에서 보면 두 모델 모두 국가전략으로 채택하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미국식 모델은 최신 기술을 활용하는 데 장점이 있지만, 자국의 데이터를 글로벌 기업이 가져가는 등 AI 주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식 모델은 정부 간 협력 사업으로 그동안 많은 개발도상국에 적용된 바 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 정부와 기업이 모든 일을 폐쇄적으로 추진해 개도국의 자율적인 산업 발전이나 인재 양성이 불가능한 모델임이 증명됐다.
한국은 AI 시대에 새로운 대안 모델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처럼 정부가 나서지도 않고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 구축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글로벌 테크기업과 긴밀히 협력하며 많은 부품과 장비를 수입한다. 반면 미국 모델에 의존하는 유럽 등 다른 나라와 달리 자국의 산업 생태계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 결과 검색에 구글 대신 우리의 검색서비스를 쓰고, 문서작성도 자국 소프트웨어로 하는 예외적인 나라가 되었다. 기술은 글로벌 기업들과 협력하면서, 산업과 활용체계는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바로 한국 모델이라 할 수 있다.
AI 시대, 특히 소버린 AI가 중요하게 간주되는 시대에 한국 모델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한국이 일관되게 추진해 온 인프라 중심의 발전전략도 개도국이 따라야 할 중요한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직접 산업에 개입하는 대신 국가 차원의 인프라 구축을 주도하고 이를 통해 관련 산업의 비용 부담을 줄여주는 모델은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시장의 효율성을 생산적으로 결합한 모델이 아닐 수 없다.
◇ 한국형 AI 인프라의 미래
한국이 AI 시대에 인프라 성공신화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국민의 적극적 지지를 얻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극적'이라는 말이다. 1990년대 정보화 시대를 돌아보면, 우리 국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정보화를 응원하고 기꺼이 희생도 감수했다. 반면 지금의 상황을 보면, 4차 산업혁명이든 AI 시대든 머리로는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가 AI 선진국이 되면 좋지만, 이를 위해 내가 불이익을 볼 수는 없다는 아주 소극적 지지가 현재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정부와 공공부문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지만, 학계, 언론, 산업계 모두 협력해 AI에 대한 국민의 적극적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둘째, 인프라에 대한 선도 투자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산업 인프라에 투자한 것이나 정보화를 위해 통신 인프라에 투자한 것은 모두 그 시대 한국이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 대규모 투자였다. 앞으로 AI 시대를 위해서도 정부는 과감한 메가 투자를 추진해야 한다. 컴퓨팅 파워, 데이터 센터, 친환경 에너지 그리드 등 꼭 필요한 필수 인프라에 대해서는 현재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더라도 과감한 투자를 통해 AI 발전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셋째, 미래지향적 정책과 사업에 반드시 뒤따르는 리스크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도록 제도와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법과 제도가 때맞춰 마련되지 않아 정부 정책과 사업이 실패할 위험성이 크다. 그래서 정부의 정책은 제도 완비를 기다리고, 제도는 정부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도돌이표 책임 전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샌드박스 등 특례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테스트베드를 확충하는 등 지원방안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의 대전환기에 적극적으로 일한 공무원과 기업을 인정해 주고 보호하는 행정적,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다.
국가의 미래는 결국 인프라의 질적 수준에 달려 있다.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그랬고, 1990년대 초고속 정보통신망이 그랬듯이, AI 인프라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 전체의 AI 역량을 높이고, 모든 국민이 혜택을 누리는 포용적 성장으로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해야 할 때다.
황종성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원장 js.hwang@nia.or.kr
〈필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에 입사해 전략개발부장, 정보화평가부장, 정보화기획단장, 정책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세계도시 전자정부 협의체 사무국장, 서울시 정보화기획단장, 부산 에코 델타시티 총괄계획가 등을 역임한 국내 최고 스마트시티·지능정보화 분야 전문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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