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천고마비, '위기의 계절'서 '풍요의 계절'로

2024. 11. 1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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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마비(天高馬肥)', 글자 그대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이다.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 활동하기 좋은 시절임을 드러낼 때 쓴다. 하지만 이 말도 애초부터 이런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
연합뉴스


“세호 여자친구와 우리 부부가 같이 골프를 치러 갔었다. 여자분이 키가 엄청 크시고, 얼굴이 가관이더라.” “그렇게 표현하는 게 아니야! 여러모로 부적절해. ‘가관’은 비아냥대는 거야.” “재준이랑 오랫동안 친했잖아. 이 친구의 ‘가관’은 칭찬이다. 우리가 한라산에 같이 갔었는데 재준이가 한라산의 멋진 절경을 보더니 ‘야, 가관이다!’라고 하더라.” 지난달 개그맨 조세호 씨의 결혼식이 화제 속에서 치러졌다. 그가 지난 7월 한 방송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절친으로 알려진 이들과 함께 특유의 입담을 과시했다.

반대되는 쓰임새로 의미변화 이뤄

이 대화에서 주목할 것은 ‘가관’이다. 지난호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말은 ‘옳을 가(可), 볼 관(觀)’, 즉 경치가 꽤 볼 만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꼬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원래 칭찬을 나타내던 게 지금은 반대로 비웃음을 담은, 놀림조의 말로 쓰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세호 씨와 친구들이 나눈 대화는 우리말 이해도가 꽤 높은 수준임을 드러낸다. 동시에 지난호에서 살핀 ‘점입가경’(① 갈수록 점점 더 좋거나 재미가 있음 ② 갈수록 하는 짓이나 몰골이 꼴불견임)과 함께 깊어가는 가을 끝자락에 음미해볼 만한 우리말이다.

‘점입가경’은 중국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에게서 유래한 사자성어다. 그는 사탕수수를 먹을 때 항상 뿌리에서 먼 데서부터 씹어먹었다. 그 이유를 그는 “갈수록 단맛이 강해지기 때문(漸入佳境)”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상황이 갈수록 재밌어지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하지만 이 말도 요즘은 원래 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그것도 정반대 뜻으로 바뀌어 꼴불견을 가리킬 때 쓰이니 우리말 중에서도 특이한 유형으로 분류할 만하다. 가을을 상징하는 말 하면 떠오르는 ‘천고마비’도 이런 범주에 들어가는, 놓칠 수 없는 말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 글자 그대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이다.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 활동하기 좋은 시절임을 드러낼 때 쓴다. 하지만 이 말도 애초부터 이런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이 출전이다. 여기에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 말이 우리가 쓰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어원이다.

‘가관-점입가경-천고마비’ 비슷해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가 담긴 곡절이 있다. 중국 중원(中原)은 토지가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해 예로부터 문명이 발달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북방 만리장성 너머는 척박한 땅이었다. 수렵 생활을 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유목민족의 터전이었다. 그중에서도 흉노족은 거칠고 사나웠다. 넓은 초원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말에게 풀을 먹이며 말을 살찌워 겨울이 닥치기 전 날쌘 말을 타고 중원의 변방으로 쳐들어와 가축과 곡식을 약탈해 갔다.

추고새마비란 ‘가을이 깊고 변방의 말이 살찌면’ 흉노족의 침입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시성(詩聖) 두보의 종조부가 북쪽 변방을 지키러 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문구다. 이 말을 일본에서 받아들이면서 섬나라 일본은 북방 오랑캐의 침범을 겁낼 이유가 없으니 ‘변방 새(塞)’를 빼고 ‘추(秋)’를 ‘천(天)’으로 바꿔 ‘천고마비’라 해 가을을 수식하는 말로 썼다는 게 정설이다. 천고마비가 전쟁을 경계하는 ‘위기의 계절’을 강조한 데서 가을의 넉넉함과 맑은 하늘을 가리키는 ‘풍요의 계절’로 탈바꿈하게 된 배경이다.

홍성호 이투데이 기사심사위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절기상으론 지난주에 이미 겨울의 시작이라는 ‘입동(立冬, 11월 7일)’이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늦게까지 이어진 여름 더위로 단풍마저 ‘지각’이라고 한다. 아쉬운 가을 끝자락에 단풍으로 물든 산에서 “점입가경이로구나” 하며 우리말을 음미해보자. “갈수록 가관이네~” 하고 감탄하는 것도 좋다. 북한의 핵도발에는 ‘천고마비의 계절’임을 되새겨볼 만하다. 그러면 자꾸 쇠약해져가는 우리말 의미도 살아나고 더 깊어지지 않을까? 부정적 또는 낭만적 쓰임새로만 알고 있을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신박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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