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승리가 남긴 것

박상현 오터레터(OTTER LETTER) 발행인 2024. 11. 1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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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미국 대선과 미디어]

[미디어오늘 박상현 오터레터(OTTER LETTER) 발행인]

▲ 11월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의 팜비치 카운티 컨벤션센터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했다. 사진=flickr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졌던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과거에도 다른 나라에서 미국의 선거를 이렇게 마음 졸이며 지켜 봤을까? 그랬던 것 같지 않다. 예전에 미국 밖에서는 그저 민주당과 공화당 중 어느 쪽이 미국의 정권을 잡게 될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미국 내에서는 모를까, 외교·안보에 관해서만은 두 당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다른 나라들은 주로 경제(무역) 정책의 향방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2016년에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는 궁극의 엔터테이너답게 미국의 정치를 전 세계로 흥행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무도 미국의 선거를 즐겁게 바라보지는 않지만, 미국인들의 표현처럼 “교통사고 현장에서 눈을 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속도로의 사고 현장과 달리, 미국의 정치는 많은 나라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트럼프 이후로 세계의 거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우익 포퓰리즘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에 트럼프를 좋아하는 사람도,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눈의 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제 트럼프는 두 번째 집권에 성공했고, 각 나라는 그의 재집권이 미칠 영향이 무엇인지 계산하기 바쁘다. 그 영향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일차적인 층위에서는 트럼프의 외교, 무역 정책이 자국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게 된다. 이건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든 해야 하는 작업이다. 다만 자기가 예측 불허라고 말하고 다니며 그걸 개인의 브랜드처럼 생각하는 트럼프라서 훨씬 까다롭다.

두 번째 층위는 트럼프라는 개인이 아닌 현상이 미칠 영향이다. 이미 2016년 이후로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우익 포퓰리즘이 득세했다. 반드시 트럼프라는 불꽃이 튄 거라고 보기는 힘들고, 비슷한 여건에서 일어난 자연발화에 가깝지만,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 현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2016년만 해도 사람들은 트럼프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진단했다. 민주주의적 절차로 당선된 사람들이 독재자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많은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 분석 자체는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의 결과를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건 현상 전체에 속한 한 단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카멀라 해리스와 민주당은 미국 유권자가 트럼프가 민주주의와 여성의 인권에 대한 위협임을 이해한다면 해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해 표를 줄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카멀라 해리스와 팀 월즈의 선거운동은 그 위협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미국인들은 다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regime)이나 민주주의가 아닌, 시스템 전체를 불신하고 있었고, 그걸 무너뜨릴 후보를 찾고 있었다.

▲ 2024년 8월 6일(미국 현지시간)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부통령 러닝메이트인 팀 왈츠(Tim Walz)를 발표했다. 사진=flickr

민주당과 지지자들은 2020년 선거에서 패한 트럼프가 지지자들에게 의회를 습격하라고 명령해서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트럼프 컬트'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종교적으로 세뇌가 되지 않은 이상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권자의 절반이 트럼프를 지지했을 때는, 그것도 더 이상 백인들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 집단에서 그를 지지했을 때는 더 이상 컬트라는 말로 퉁칠 수 없다. 2016년에는 맞을 수도 있었겠지만, 2024년에는 틀리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트럼프가 의회를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한 게 아니라, 공격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 것이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은 트럼프가 내놓은대개는 두서없고 즉흥적인개별 정책 때문에 그를 지지한 게 아니라, 그가 다시 백악관에 들어가면 미국의 시스템이 파괴될 거라고 기대해서 지지한 것이다. “트럼프는 시스템에 반대하는(anti-system) 후보”라는 표현이 그래서 나왔다.

그런 구도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트럼프가 어긴) 법 제도를 수호하고, 여성의 인권을 지키는 민주당은 보수세력이 된다. 문자 그대로 현재 미국 사회가 가진 가치를 지키는(保守, 보수) 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트럼프가 진보 세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는 '변혁의 주도자(change agent)'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일단 그런 구도가 만들어진 이상, 에너지는 변혁을 약속하는 쪽으로 몰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에너지는 파괴와 보복의 에너지이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생산적인 에너지가 아니다. 트럼프는 “미국을 더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하지만, 미국은 2차 대전 이후로 줄곧 세계 최강대국이었고, 지금도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는 강력한 기관차다. 여기에 미국의 아이러니가 있다. 최강대국의 국민이 “미국이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고 분노하고 있는 이상한 상황이다.

▲ 미국 제47대 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 사진=flickr

미국은 이제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내각에 많이 참여했다. 정치 경험이 없는 트럼프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들은 트럼프가 나라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애국하는 마음으로 트럼프의 탈선을 막는 가드레일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들이 훗날 “트럼프는 대통령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줄줄이 선언하면서 트럼프의 분노를 샀고, 트럼프는 다시 권력을 잡으면 능력보다 충성심을 위주로 인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 가드레일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가드레일이 없는 길을 질주하는 운전자를 환호하는 사람들은 마치 대형 사고를 볼 기대에 자동차 경주를 구경하는 사람들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차에 탄 승객들, 즉 미국 국민이다. 대통령직을 개인의 돈벌이에 사용하는 트럼프나, 그를 지지하는 일론 머스크와 같은 갑부들은 망가지는 시스템을 통해서 큰돈을 벌 수 있겠지만, 다른 국민은 무엇을 얻을지 아무도 모른다. 트럼프가 승리한 직후에 그의 공약에 관한 검색이 폭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많은 유권자가 자기가 얻을 게 뭐고, 잃을 게 뭔지 모르고 투표를 했는지 보여준다. 그저 자기가 편입하지 못한 질서, 동의하기 싫은 룰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정서적 만족감일까?

이제 앞으로 4년 동안 미국의 민주당과 다른 나라들은 피해의 최소화에 노력할 뿐, 미국발 대형 교통사고는 피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 잔해에서 어떤 새로운 질서가 탄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보수가 된 미국의 민주당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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