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기의 HR 이야기] 겸손·존중·소통…HR 필수 리더십 담긴 아버지의 커리어 노트
뒤돌아보니 벌써 35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의 커리어 노트’를 받아본 것이. 그해 겨울바람은 한 청년(필자)에게 유독 매섭게 느껴졌다. 양어깨에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한겨울에 최전방 부대 소대장 보임을 받고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한 장의 메모를 건넸다. 당신의 눈에는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아들을 험난한 세상으로 떠나 보내야만 하는 상황. ‘이 아이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에 마음 한편이 못내 불안했던 모양이다. 자식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준다. 장남인 내게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젊은 시절 아버지는 육군 장교라는 같은 길을 먼저 걸었기에. 돌이켜 보니 나는 잔소리와 견책의 목소리보다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성장해 온 것 같다.
일곱 가지 원칙 적힌 아버지의 커리어 노트
아버지의 글씨는 누가 보아도 명필이다. 그 선명한 필체로 메모지에는 일곱 가지 ‘근무 요령’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그 의미를 내게 설명했다. 그냥 별생각 없이 읽어봐서 그랬을까.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처음에는 그리 가슴에 와닿지 않았는데, 국내 대기업을 비롯해 최고 인재만 모인다는 여러 다국적기업에서 20년 이상의 나름 경쟁력 있는 커리어를 쌓은 지금, 이 시점에서 아버지의 메모를 바라 보노라면,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파워풀한 ‘원칙과 철학’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무릎을 치게 된다. 지나간 커리어의 여정에서 수십억, 수백억원의 연봉을 받는 많은 프로를 보았지만, 이 일곱 가지를 일상에서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을 생각만큼 그리 많이 만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짧지 않은 시간을 기업에서 인사 책임자로 일했던 내 입장에서는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긴 요즘 들어서 오히려 더 아버지 메모의 ‘숨어있는’ 가치를 새삼 느끼곤 한다.
아버지 당부 'HR 핵심 역량'으로 재정의
‘인사쟁이’라는 직업병 때문에 ‘아버지 커리어 노트’의 일곱 가지 당부 사항을 인사관리(HR)에서 강조하는 핵심 역량으로 기술을 해보니 표와 같이 재정의할 수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심플함에 주요한 필수 리더십 덕목이 녹아 있다. 아버지의 눈에는 아마엉성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근무 요령’ 을 잘 지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무사히 3년간의 임무를 마쳤다. 사회에 나와서도 그 메모지를 쉽게 처분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애정이 담긴 메모지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아버지는 그것을 실천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이따금 그 글을 꺼내 보면서 이 쉽지 않은 조직 생활에서 스스로가 길을 잃지 않고 잘 행진하고 있는지를 체크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걸어왔던 길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우치게 됐다. 그 불확실했던 혼돈의 시대를 당신(아버지)은 힘들다는 넋두리 한번 없이 가정의 리더로서, 사회의 중산층으로 어떻게 그리도 꿋꿋이 버텨 왔을까.
경기가 불황이고 사는 게 빡빡하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우리 아버지의 청장년 시절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롭다. 그런데 ‘어떻게 살 것인가’ ‘직장을 어떻게 다닐 것인가’ ‘차세대를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심히 흔들리는 모습이다. 경영진에게 압박당하고, 젊은 세대의 저항에 전전긍긍하는 우리 리더는 일단은 성공 사례에 대한 벤치마킹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트렌드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리곤 한다. 이를 무조건 비난만 할 순 없지만, 오히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비즈니스의 일상에서 가장 우리다운 모습으로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해주는 지혜가 더 필요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잊을 만하면 국내 굴지의 S그룹, L그룹에서 전화나 이메일로 효과적인 성과 관리와 구성원의 커리어 개발 방법론에 대한 문의를 받는다. 이런 문의는 보통 팀장급이 하는데, 당연히 대표이사의 주문을 받아 문의하는 것이다. 그들은 필자가 근무했던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이 ‘뭔가’ 특별한 비책과도 같은 성공 노하우가 있을 것이라는 ‘맹신’ 을 하고 장시간 전화통을 붙들고 질문을 해댄다. 그러나 역으로 차근차근 그들에게 질문을 하면서 기대하는 성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전제돼야 할 조직의 문화나 인재 육성을 위한 중요 습관에 대한 일상적 실천 수준을 점검해 보면 어느 순간 자꾸 본질을 회피하고 움츠러드는 그들의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면 구성원을 그림자처럼 꾸준히 관찰하고 팩트(사실)와 객관성 중심으로 발전적인 피드백이나 코칭을 정기적으로 해주는 것, 구성원의 성장과 성공을 자신의 성공만큼이나 중요한 목표로 여기는 것, 리더 자신이 먼저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구성원의 진짜 성장을 기대하는 조직(기업)이 놓쳐서는 안 될 철칙이다.
조언은 구조화된 메세지가 효과적
올가을 만 92세의 나이가 된 내 아버지는 아직도 비교적 건강하다. 혼자서 지팡이 등을 사용하지 않고 가까운 동네를 산책하고 가족과 대화를 나누는 데 거의 문제가 없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삶을 살아 냈기에 그럴 여력도 여유도 없었겠지만,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비록 거창한 계획은 없지만 일상사에서 자신을 잘 관리하면서 몸으로 삶으로 교훈을 준 것 같다. TV를 볼 때는 그냥 본 적이 별로 없고 조용히 맨손체조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시청을 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체중계 앞으로 가서 몸무게를 측정했다. 50대 후반부터는 의식적으로 흰쌀밥의 양을 줄였다. 체중이 약간 오버했다고 판단하면 거창한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그냥 퇴근길에 한두 정거장 미리 하차해서 집으로 걸어오곤 했다. 잔소리보다는 중요한 말은 진정성 있는 편지로 대신한다. ‘라떼(나 때는 말이야 식의)’ 잔소리보다는 정리된 글이나 구조화된 메시지가 훨씬 파워가 있다. 떠들면 잔소리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 전문가의 매뉴얼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그들만의 일상의 중요한 철학이나 습관과 접목되면 더욱 좋겠다. 말보다는 한결같은 뒷모습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결실의 계절 가을에 조직의 리더로 우리는 이제 어떤 노트로 다음 세대와 후배의 기준이 될 ‘커리어 내비게이션’ 이 될지 깊이 고민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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