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물들 시간이 없었어요

백소아 기자 2024. 11. 1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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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늦을 줄 몰랐습니다.

이번 선물에는 꼭 노란 은행나무를 담겠노라 다짐했는데 생각보다 더디게 물드는 단풍에 며칠 동안 '눈치 게임'을 했습니다.

일과는 별개로 저는 요즘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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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아의 포토 굿즈 9회
올해 단풍이 예년만치 못하다고 합니다. 여름은 길었고 더위는 가을의 자리까지 뺏어 앉아 오래도록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빛깔이 어디 가겠나요. 끝없이 이어지는 은행나무 길에 서 있자니 \'우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렇게 늦을 줄 몰랐습니다. 이번 선물에는 꼭 노란 은행나무를 담겠노라 다짐했는데 생각보다 더디게 물드는 단풍에 며칠 동안 ‘눈치 게임’을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단풍없는 단풍구경을 다녀왔다”는 이야기에 점점 불안했습니다. 은행나무 단풍으로 유명한 충북 제천 배론성지, 괴산 문광저수지, 강원도 원주 문막읍 반계리까지 매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를 지켜보다가 갑작스러운 한파 소식에 뒤도 보지 않고 경기도 여주 강천섬으로 향했습니다.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못 찍을 수도 있으니까요. 갑작스럽게 눈이 내릴 때 ‘조금 이따가 찍어야지’하며 다른 일을 먼저 하면 어느새 눈은 그칩니다. 그뿐인가요, 집회 현장에서도 누구보다 간절하고 팔뚝질을 하는 참가자를 눈여겨보다가 아주 잠깐 렌즈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 그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참 신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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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는 별개로 저는 요즘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조급하게 말을 내뱉지 않으려 노력 중입니다. 제 스스로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물어봅니다. 또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를 곱씹어 봅니다. 그러고 나면 그때의 말과 행동이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다시 주워 담을 수도 돌릴 수도 없으니까요. 그때엔 보이지 않는 생각과 이해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정리가 됩니다. 아쉽게도 생각의 끝이 늘 자책으로 끝나지만 그래도 언제인가 이 모순의 순환이 끝날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지난 4일 경기 여주시 강천섬으로 향하는 길, 참으로 마음을 졸였습니다. 밤사이 지나간 가을비에 혹시라도 은행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것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다행히 강천섬 끝자락을 가로지르는 은행나뭇길에는 아직 노란 은행잎이 빼곡했습니다.

여주 강천섬은 4대강 공사 이전에 주민들이 땅콩을 많이 재배해 ‘땅콩섬’으로 불리던 곳입니다. ‘바위늪구비’와 이어진 습지였는데 4대강 공사로 샛강을 뚫고 둑을 쌓으면서 섬이 됐습니다. 6만㎡에 이르는 섬에는 갈대숲, 단양쑥부쟁이, 억새, 목련 등도 만날 수 있습니다. 넓은 잔디광장에서는 주말에 종종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합니다. 강천섬 주차장 인근과 굴암리 주민회관 인근 두 다리를 통해 자전거와 보행자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강천섬에는 노란 은행잎 카펫이 깔렸을 겁니다. 잎을 모두 떠나 보낸 은행나무는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 있겠지만, 또 한번 찬란하게 빛날 가을을 기다리겠죠. 다음 선물은 추운 겨울이 반가운 이유 중 하나를 준비하겠습니다. 큰 일교차에 감기 조심하세요.

가을 바람에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지자 사람들은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황홀한 순간을 휴대폰으로 찍으려고 노력하지만 이내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가끔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온전히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때가 있습니다. 백소아 기자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노란 하늘이 펼쳐집니다. 구름 한 점 보일 틈 없이 정말 빽빽합니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바람에 흔들이는 은행나무들이 추상화처럼 보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러빙 빈센트’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백소아 기자
대부분의 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었지만 띄엄 띄엄 아직 제대로 단풍이 들지 않은 나무도 보입니다. 차마 물들기 전 가을 바람에 떨어진 초록 낙엽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지난 여름 무척이나 길었던 더위는 야속하게도 나무들이 충분히 물들 시간을 뺏어 갔습니다. “단풍 없는 단풍놀이”라며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은행나무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 올해는 제대로 물 들 시간이 없었습니다.” 백소아 기자
그런 은행나무에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사람의 잘못이라고요. 다음 가을에는 곱게 물들 시간이 충분할 거라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습니다. 백소아 기자
사실 노란 은행잎을 하나하나 톺아보면 그 끝이 타 들어가거나 얼룩진 잎들이 대부분입니다. 얼룩 하나 없이 온전히 물든 은행잎이 반도 되지 않습니다. 백소아 기자
그리고 은행나무 길에서 몇 걸음 떨어져서 구경해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은행나무에 둘러싸인 황홀감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합니다. 그리고 강천섬 구석 구석에 숨겨진 은행나무들도 많답니다. 보물찾기 놀이를 하듯 거니시길 바랍니다. 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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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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