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라자’에서 끝나선 안 돼…미래 성장산업 ‘제약·바이오’, 공생해야 살아남는다[비즈니스 포커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한국 제약·바이오 업계가 당면한 현실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유한양행이 글로벌 빅파마인 얀센에 기술수출한 비소세포암 치료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가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으면서 ‘글로벌 신약’의 꿈을 실현한 지 두 달여가 지났다. 업계에선 ‘포스트 렉라자’ 탄생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관련 기업들이 당면한 현실은 고되다. 금융위기 이후 풀린 달콤한 유동성이 마르자 신약개발의 최전선에 있는 바이오텍들은 위기에 직면했다. 성패를 예상할 수 없는 초기 개발 단계부터 수십억~수백억원의 투자가 필요한 환경에서 얼어붙은 자본시장은 쉽게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투자금이 떨어진 일부 바이오텍은 일반대출을 받아가며 연명하고 있다.
11월 6일 열린 ‘한국제약바이오협회 2024 프레스 세미나’에선 각계 전문가들이 힘든 시장환경에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고 성장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현재 글로벌 제약 시장은 이미 상용화된 항체약물접합체(ADC)와 표적단백질분해(TPD)가 각광 받으며 빠르게 주류로 자리 잡는 가운데 개발 단계에서 인공지능(AI) 기술 접목이 활발해지는 흐름이다. 동시에 미국의 중국 바이오 기업을 견제하는 취지의 ‘생물보안법(Biosecure Act)’이 하원을 통과하는 등 미·중 글로벌 공급망 갈등이 가시화하고 있다.
시장에선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이 같은 흐름을 기회로 살릴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그러기에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공존하고 있다.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은 이날 세미나에서 “정부의 제약·바이오산업의 R&D 투자는 GDP 대비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지만 규모 자체만을 보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노 회장은 “투자 시장도 침체했고 새로운 치료 접근 방법(신규 모달리티)이나 AI 기술의 활용 등에서 국내 기업의 기술 경쟁력은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기업·투자자, 장기적 인식 필요해
신약개발 성공은 그야말로 ‘신이 내려야’ 가능한 일이다. 신약개발은 5번 ‘죽음의 계곡(Death Vally)’을 지나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치료 표적, 후보물질 발굴에서 전임상, 임상 3상, 상업화까지 이어지는 10년여의 여정에서 마침내 새 약물이 효능이 좋고 부작용도 적다고 밝혀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후보물질 수천 개 중 하나가 성공하는 정도다.
출시 타이밍도 중요하다. 글로벌 임상까지 수천억원이 투입되는 만큼 시장에서 반응이 충분히 나올 만한 약을 내놓아야 수익성 확보가 가능하다.
지금까지 국내 자본시장은 이 같은 신약개발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평이다. 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신약개발 실패사례가 늘자 “바이오 업체는 사기꾼과 같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
주식 상장이나 기술이전만 바라보는 일부 바이오벤처 사례도 문제였다. 벤처캐피털(VC) 투자역인 우정규 유안타인베스트먼트 이사는 “그동안은 방만하게 운영해도 상장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투자자 우위 상태에서 일부 투자역은 대표이사 연봉까지 살피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우 이사는 제약·바이오 벤처의 성장 비결로 ‘메타인지’와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꼽았다. 그는 “냉정하게 밖에서 봤을 때 내가 가진 기술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기업, 주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한편 라이선싱 아웃만 바라보지 말고 사업개발 계획을 지킬 수 있는 기업인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쟁보다 파이 키우기가 우선
최근 국내 대형 제약사들이 개방형 혁신을 통해 기술에 투자하는 흐름이라 이 같은 협업 역량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유한양행이 개발한 렉라자 역시 국내 바이오 벤처가 개발한 후보물질을 도입한 사례다.
우 이사는 “앞으로 유한양행 사례가 10개는 나와야 국내 시장 환경도 바뀔 것”이라며 “바이오 섹터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지를 가지고 바이오텍은 성공 레퍼런스를 쌓아가고 정부는 규제를 줄여야 5년에서 10년 안에 우리에게도 바이오붐이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약개발에 활용되는 AI 플랫폼 조성 측면에서도 관련 기업과 기관들 간 협업이 필요하다. AI 기술을 통한 데이터 분석은 신약개발 비용과 기간을 줄이고 있다. AI가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가 다양할수록 성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에선 2019년부터 2022년까지 10개 제약사가 참여하는 멜로디사업을 진행해 협업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이때 만들어진 AI가 각 사가 개별적으로 개발했던 모델보다 성능이 뛰어났다는 평가다.
한국에서도 올해부터 2028년까지 5년에 걸쳐 EU를 벤치마킹한 K-멜로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보건복지부에서 300억원 기금을 조성했고 다수의 제약사, 보험사, 연구기관 등이 참여하고 있다.
표준희 AI신약융합연구원 부원장은 “AI는 매우 고품질의 데이터를 필요로 하지만 각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는 파편적이며 이들은 지식재산권과 보안 문제로 자사의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는다”며 “이에 따라 연합학습 협업모델이 새로운 방법론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표준희 부원장은 “AI 기술 적용을 통한 기술개발 비용 절감 수준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이르지만 10년 정도 걸리는 개발 기간 중 2년 정도를 단축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고 밝혔다.
‘트렌드 쏠림’ 피해야
신약개발 분야에서 AI만큼 주목받는 트렌드는 ADC와 TPD이다. 두 기술은 모두 표적 항암세포를 집중 파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ADC는 표적 항원에 작용하는 항체에 독성 약물을 링커 기술로 연결해 약물이 정상 세포를 파괴하지 않고 문제 세포만 파괴하도록 한다.
ADC는 1910년에 처음 개념이 등장해 1957년부터 기술 시도를 시작한 긴 역사를 지닌 기술이다. 1970년대 처음으로 임상을 시작했으나 2019년이 돼서야 유방암, 위암 치료제로 유명한 ‘엔허투’(성분명 트라스트주맙 데룩스테칸)가 등장하면서 급격하게 주류로 부상했다. 이를 잇는 TPD는 체내에 있는 단백질 분해 시스템을 이용해 질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파괴하는 방식이다. 2030년까지 시장 규모가 6억 달러(2조38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보유한 글로벌 빅파마와 중국 대형 바이오 업체들은 모두 인수합병(M&A) 전략을 통해 ADC 등 유망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빅딜은 화이자의 씨젠 인수다. 씨젠은 ADC 분야 선도업체다.
국내에선 오리온이 투자한 리가켐바이오(구 레고캠바이오)가 지난해 12월 얀센과 신약후보물질 ‘LCB84’에 대한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하며 계약금 1300억원을 수령해 화제가 됐다. 대형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기업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에피스도 일제히 ADC 파이프라인을 공개하고 임상 계획을 밝혔다.
이 밖에도 민간 차원에서 신약개발에 대한 더욱 전폭적인 투자가 필요한 실정이다. 지난해 국내 10대 제약·바이오 기업의 연구개발비 합계는 1조9836억원으로 글로벌 빅파마 1개 사의 연구개발비 수준에도 못 미친다. ADC 외 다양한 기술개발도 이뤄져야 한다. 10년 이상 걸리는 신약개발 과정에서 트렌드는 변할 수 있다.
한종수 신한투자증권 팀장은 “2010년대부터 제약계 빅딜은 빅파마들이 ADC를 비롯해 다양한 기술을 보유하기 위해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 팀장은 “한국 기업들이 AI, 유전자 편집 등 신기술을 가진 해외 바이오 기업의 인수에도 적극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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