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한 자기는 다 깨뜨려라" 황제가 반한 천하제일의 도자기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11. 11. 09:03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중국 최고의 도자기 메카가 빚어낸 '징더대곡' - 장시 징더전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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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이 뛰어난 중국 도자기를 소장한 곳은 어디일까? 뜻밖에도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고궁(故宮)박물원이 주인공이다.
고궁박물원이 소장한 유물은 69만여 점에 달한다. 이 중 서적 21만여 권과 문헌 39만여 건을 제외하고 도자기가 2만 5,595점으로 가장 많다. 모두 송, 원, 명, 청 등 네 왕조가 수집했거나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오래됐고 종류가 다양하고 풍부하다. 중국은 1928년에 '고궁박물원 조직법'을 제정하여 역대 왕조의 유물은 베이징으로 모아 체계적으로 보관했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베이징은 위험에 노출됐다. 1933년에 일본군이 산하이관(山海關)까지 접근해 오자, 고궁박물원은 유물을 상하이로 옮기기로 했다.
먼저 고궁박물원은 중요 유물을 이송했다. 또한 베이징 내 여러 기관의 주요 유물도 옮겼다. 상하이의 유물은 1936년 난징(南京)에 고궁 분원이 설립되자, 모두 이전했다.
이듬해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고궁박물원은 베이징에 남아있던 유물과 난징 유물을 내륙의 쓰촨(四川)성으로 보내기로 했다. 첫째로는 베이징의 유물을 이송했다.
둘째로는 난징의 유물을 쓰촨으로 옮겼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귀중한 유물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안전할 수 있었다.
종전 이후 쓰촨의 유물은 충칭(重慶)으로 이송해서 한데 모은 뒤 수로를 통해 베이징으로 돌려보내졌다. 하지만 1948년 국공 내전이 격화되면서 상황이 엄중해졌다. 그해 10월 고궁박물원은 중요 유물을 대만으로 옮기기로 했다.
1차로 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 유물을 함선에 실어 대만으로 보냈다. 1949년 1월에 2차로 다시 두 곳의 유물을 이송했다. 이때 여러 기관이 소장했던 유물도 보냈다.
같은 달 3차로 남아있는 모든 유물을 이송했다. 이처럼 유물은 오랜 기간 육로와 수로로 운송됐으나 다행히 손상된 것은 아주 적었다.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송한 유물은 모두 60만 8,985점이었다. 방대한 유물 덕분에 고궁박물원은 오늘날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자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흙으로 굽던 토기에서 출발한다. 토기는 노천에서 나무를 사용하여 구웠기 때문에 굽는 온도가 400~700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철과 구리를 제련하기 위해 가마가 발명되면서, 온도는 1,000도까지 올라갔다.
그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흙이 풀어지거나 물이 새는 토기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이런 도기를 더욱 비약적으로 발견시킨 자기는 중국에서 발명됐다. 점성이 흙보다 높은 고령토를 찾아 사용하고, 1,300~1,400도의 고온에서 구울 수 있는 가마 기술까지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당대였다. 전설에 따르면, 7세기 상인인 도옥이 고향 창남(昌南)에서 한 도공이 생산한 자기를 매입해 수도인 장안(長安)에 가져다 팔았다. 자기를 처음 본 장안 주민들은 옥기인 줄 알 만큼 도기와 전혀 달랐다.
그 소식은 곧 조정에 전해졌다. 당 황실은 도옥에게 자기를 대량으로 진상하도록 명령했다. 창남은 오늘날 장시(江西)성 징더전(景德鎮)이다.
진상품이 된 자기는 백자로, 백색 점토에 회(灰)가 주성분인 유약을 발랐다. 당시 자기는 황실과 귀족만 쓸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왜냐하면 자기의 원료인 백토가 희귀해서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정은 백토의 생산을 철저히 통제해서 아무나 채취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당대 말기 징더전에서 49km 떨어진 고령산(高嶺山)에서 엄청난 양의 고령석이 발견됐다.
고령석을 분쇄해서 백토로 가공한 것이 고령토다. 고령산의 고령토는 품질이 뛰어났다. 그로 인해 징더전의 자기는 순식간에 천하제일로 발돋움했다.
고령토의 명칭도 고령산에서 따와 이름 지어진 것이다. 송 황실도 징더전의 자기를 아꼈다. 특히 3대 황제인 진종은 밝은 청자를 무척 좋아했다. 1004년에 연호를 경덕(景德)으로 바꿀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청자를 생산하던 창남에게 '징더전'이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했다.
그래도 북송대까지 자기의 패권은 여전히 중국 북부가 갖고 있었다.
1126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건국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남송 조정은 금나라보다 열악한 군사력을 경제력으로 맞서려고 했다. 그에 따라 해상무역을 강화했고, 해외에서 최고의 인기 품목인 자기를 대량 생산해서 수출했다.
여기서 징더전이 큰 활약을 펼쳤다. 남송대 징더전에는 성 안팎에서 300여 개의 자기 공방이 자신의 브랜드를 가지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제작 과정에서 세분화가 일어나면서, 자기만 전문으로 생산하는 직업과 이를 거래하는 계층이 폭넓게 형성됐다.
이렇게 산업화한 징더전이 쏟아내는 자기는 대륙 곳곳으로 퍼지면서 평민까지 손쉽게 구매해서 사용하게 됐다. 하지만 남송을 정벌한 원나라는 전혀 다른 정책을 시행했다. 1279년 징더전 북부에 부양(浮梁)현을 설치했고, 산하에 자기국(瓷局)을 두어 징더전의 자기 산업을 관리했다. 자기국은 황실에서 쓸 자기를 생산하는 공방을 감독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전 세계에서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이 뛰어난 중국 도자기를 소장한 곳은 어디일까? 뜻밖에도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고궁(故宮)박물원이 주인공이다.
고궁박물원이 소장한 유물은 69만여 점에 달한다. 이 중 서적 21만여 권과 문헌 39만여 건을 제외하고 도자기가 2만 5,595점으로 가장 많다. 모두 송, 원, 명, 청 등 네 왕조가 수집했거나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오래됐고 종류가 다양하고 풍부하다. 중국은 1928년에 '고궁박물원 조직법'을 제정하여 역대 왕조의 유물은 베이징으로 모아 체계적으로 보관했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베이징은 위험에 노출됐다. 1933년에 일본군이 산하이관(山海關)까지 접근해 오자, 고궁박물원은 유물을 상하이로 옮기기로 했다.
먼저 고궁박물원은 중요 유물을 이송했다. 또한 베이징 내 여러 기관의 주요 유물도 옮겼다. 상하이의 유물은 1936년 난징(南京)에 고궁 분원이 설립되자, 모두 이전했다.
이듬해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고궁박물원은 베이징에 남아있던 유물과 난징 유물을 내륙의 쓰촨(四川)성으로 보내기로 했다. 첫째로는 베이징의 유물을 이송했다.
둘째로는 난징의 유물을 쓰촨으로 옮겼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귀중한 유물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안전할 수 있었다.
종전 이후 쓰촨의 유물은 충칭(重慶)으로 이송해서 한데 모은 뒤 수로를 통해 베이징으로 돌려보내졌다. 하지만 1948년 국공 내전이 격화되면서 상황이 엄중해졌다. 그해 10월 고궁박물원은 중요 유물을 대만으로 옮기기로 했다.
1차로 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 유물을 함선에 실어 대만으로 보냈다. 1949년 1월에 2차로 다시 두 곳의 유물을 이송했다. 이때 여러 기관이 소장했던 유물도 보냈다.
같은 달 3차로 남아있는 모든 유물을 이송했다. 이처럼 유물은 오랜 기간 육로와 수로로 운송됐으나 다행히 손상된 것은 아주 적었다.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송한 유물은 모두 60만 8,985점이었다. 방대한 유물 덕분에 고궁박물원은 오늘날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자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흙으로 굽던 토기에서 출발한다. 토기는 노천에서 나무를 사용하여 구웠기 때문에 굽는 온도가 400~700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철과 구리를 제련하기 위해 가마가 발명되면서, 온도는 1,000도까지 올라갔다.
그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흙이 풀어지거나 물이 새는 토기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이런 도기를 더욱 비약적으로 발견시킨 자기는 중국에서 발명됐다. 점성이 흙보다 높은 고령토를 찾아 사용하고, 1,300~1,400도의 고온에서 구울 수 있는 가마 기술까지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당대였다. 전설에 따르면, 7세기 상인인 도옥이 고향 창남(昌南)에서 한 도공이 생산한 자기를 매입해 수도인 장안(長安)에 가져다 팔았다. 자기를 처음 본 장안 주민들은 옥기인 줄 알 만큼 도기와 전혀 달랐다.
그 소식은 곧 조정에 전해졌다. 당 황실은 도옥에게 자기를 대량으로 진상하도록 명령했다. 창남은 오늘날 장시(江西)성 징더전(景德鎮)이다.
진상품이 된 자기는 백자로, 백색 점토에 회(灰)가 주성분인 유약을 발랐다. 당시 자기는 황실과 귀족만 쓸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왜냐하면 자기의 원료인 백토가 희귀해서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정은 백토의 생산을 철저히 통제해서 아무나 채취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당대 말기 징더전에서 49km 떨어진 고령산(高嶺山)에서 엄청난 양의 고령석이 발견됐다.
고령석을 분쇄해서 백토로 가공한 것이 고령토다. 고령산의 고령토는 품질이 뛰어났다. 그로 인해 징더전의 자기는 순식간에 천하제일로 발돋움했다.
고령토의 명칭도 고령산에서 따와 이름 지어진 것이다. 송 황실도 징더전의 자기를 아꼈다. 특히 3대 황제인 진종은 밝은 청자를 무척 좋아했다. 1004년에 연호를 경덕(景德)으로 바꿀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청자를 생산하던 창남에게 '징더전'이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했다.
그래도 북송대까지 자기의 패권은 여전히 중국 북부가 갖고 있었다.
1126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건국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남송 조정은 금나라보다 열악한 군사력을 경제력으로 맞서려고 했다. 그에 따라 해상무역을 강화했고, 해외에서 최고의 인기 품목인 자기를 대량 생산해서 수출했다.
여기서 징더전이 큰 활약을 펼쳤다. 남송대 징더전에는 성 안팎에서 300여 개의 자기 공방이 자신의 브랜드를 가지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제작 과정에서 세분화가 일어나면서, 자기만 전문으로 생산하는 직업과 이를 거래하는 계층이 폭넓게 형성됐다.
이렇게 산업화한 징더전이 쏟아내는 자기는 대륙 곳곳으로 퍼지면서 평민까지 손쉽게 구매해서 사용하게 됐다. 하지만 남송을 정벌한 원나라는 전혀 다른 정책을 시행했다. 1279년 징더전 북부에 부양(浮梁)현을 설치했고, 산하에 자기국(瓷局)을 두어 징더전의 자기 산업을 관리했다. 자기국은 황실에서 쓸 자기를 생산하는 공방을 감독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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