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주 손실 속출하는데 공모가 ‘뻥튀기’ 방지 장치는 고장
수요예측 초일가점에 증권사 사전 투자로 뻥튀기 막을 방법 무력화돼
(시사저널=이승용 시사저널e. 기자)
공모주 시장에 때아닌 한파가 불어닥치고 있다. 그동안 공모주 투자는 안정적인 투자로 여겨졌다. 고평가 논란에도 신규 상장하는 기업들의 주가는 상장 첫날 공모가보다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른바 개미들조차 '치킨값이나 벌자'는 마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0월 마지막 주부터 신규 상장기업 주가가 상장일부터 공모가 이하로 급락하는 일이 연속 이어지고 있다. 공모주 투자자들로서는 이런 사례를 겪어본 적이 없기에 공모주 투자심리는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다.
공모주 시장에 찾아온 '이상 한파'
업계에서는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지난해 기업공개(IPO) 제도 개편 이후 수요예측에서 공모가가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는 일이 관례화됐기 때문이다. 증권사들도 상장 전 지분 투자를 통해 공모가 부풀리기 안전장치인 의무 인수 제도를 무력화했다. 사실상 현재 '공모가 뻥튀기'를 막을 방법이 없어졌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코스닥 신규 상장기업들의 주가가 연속 급락하기 시작한 것은 10월24일 상장한 씨메스부터였다. 공모가 3만원으로 상장한 씨메스는 상장 첫날 주가가 공모가 대비 23% 하락한 2만3100원으로 장을 마쳤다. 이후 잔혹사가 이어졌다. 10월25일 상장한 웨이비스와 에이치엔에스하이텍은 각각 공모가 대비 27.4%, 22.8% 하락한 채 장을 마감했고 28일 상장한 클로봇도 상장 첫날 공모가 대비 22.54% 하락한 채 장을 끝냈다. 10월31일 상장한 성우와 11월1일 상장한 탑런토탈솔루션, 에이럭스 역시 상장 첫날 공모가 대비 –38.3%, -23.7%, -12.5%라는 성적표를 남겼다.
씨메스와 웨이비스, 에이치엔에스하이텍, 클로봇 등은 적자기업과 기술특례로 상장하는 기업들이었다. 반면 성우, 탑런토탈솔루션, 에이럭스는 흑자를 내는 멀쩡한 기업들이었다. 흑자기업들마저 상장일 주가가 공모가 대비 급락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공모주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11월5일 상장한 에이치이엠파마는 상장 첫날 주가가 공모가 대비 28.7% 급락한 1만6400원에 장을 마감했다. 다행히 11월6일 상장한 더본코리아가 공모가 대비 주가가 상승한 채 장을 마감했지만 더본코리아는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사라 코스닥에 상장하는 IPO 기업들과는 상황이 다소 다르다.
공모주 시장에서는 자금 이탈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기관 대상 수요예측에서 공모가를 희망공모가 범위 상단을 초과해 결정하는 '상초'에 일반투자자 대상 공모청약에서 조 단위 청약증거금을 끌어모으며 최소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수요예측에서 희망공모가 범위를 넘어서는 공모가는 나오지 않고 있고 엔터테크 기업 노머스의 경우 11월4~5일 실시한 공모청약에서 경쟁률이 2.62대 1에 그치기도 했다.
공모가는 상장주관사인 증권사들이 희망공모가 범위를 제시하고 수요예측에 참여한 기관들이 가격을 써낸 이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동안 고평가 논란이 심한 IPO의 경우 기관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 공모가가 희망공모가 범위 하단 혹은 하단 미만으로 결정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신규 상장 종목의 상장 첫날 가격상한폭이 기존 공모가 대비 260%에서 400%까지로 확대되고 수요예측 관련 제도가 바뀌면서 시행된 '초일가점'이 공모가를 부풀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초일가점은 수요예측 첫날 주문을 내는 기관에 공모주 물량 배점 가점을 주는 제도다. 수요예측 첫날부터 높은 가격을 써내는 기관이 물량을 쓸어담고, 마지막까지 기업 분석을 꼼꼼히 하고 주문을 넣는 기관이 물량을 훨씬 적게 받자 기관들은 수요예측 첫날 묻지마 주문을 넣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수요예측 기능 상실에 공모가 '상초' 남발
그 결과 공모가는 대부분 희망공모가 범위 상단을 초과하는 '상초'로 결정되고 있다. 당초 수요예측 마지막 날 주문이 몰리는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도입한 초일가점이 오히려 기관들의 '공모가 뻥튀기'를 유도하게 된 것이다.
상장주관을 담당하는 증권사들의 '공모가 뻥튀기' 기술도 한층 고도화됐다. 코셈, 삼현, 하스, 피앤에스미캐닉스, 케이쓰리아이 등은 흑자기업인데 올해 기술특례로 상장했다.
기술특례 상장은 기술력이 뛰어난 적자기업들을 상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하지만 기술특례로 상장하면 현재 실적이 아니라 미래 추정 실적을 기반으로 기업 가치를 산출할 수 있다는 허점을 노리고 증권사들이 멀쩡한 흑자기업을 기술특례로 상장시키며 희망공모가 범위를 '뻥튀기'하는 것이다.
증권사들의 공모가 부풀리기 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기업 가치를 높여야 IPO 수수료를 많이 받을 수 있기에 증권사들로서는 당연히 최대한 기업 가치를 높이려고 한다. 금융 당국은 증권사들의 공모가 부풀기를 막기 위해 2013년 7월부터 코스닥 기업 상장을 주관하는 증권사가 공모 물량의 3%(최대 10억원)를 의무 인수하고 상장 후 3개월 동안 팔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공모가를 부풀리거나 부실기업을 상장할 경우 상장주관을 맡은 증권사에도 책임을 지우겠다는 의도였다.
실제로 이 제도가 도입되기 전 공모주 투자에선 손실이 빈번했다. 하지만 제도 시행부터 10여 년 동안 공모주 투자는 안정적 성과를 보여줬고 투자자들은 꾸준히 몰려들었다. 이때 증권사들은 이 같은 안전장치를 회피할 방법을 고안했다. 2013년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증권사의 비상장사 투자가 허용되자 상장 전부터 미리 IPO 기업의 주식을 싸게 사들인 다음 상장 후 매각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상장 후 주가가 공모가 대비 하락하더라도 상장 전 공모가 대비 싸게 산 주식이 의무인수 물량에 따른 손실을 상쇄해 주거나 수익을 안겨주는 원리다. 이러한 투자는 5% 이내에서 가능하지만 2020년부터는 중소기업, 벤처기업, 직전 3개 회계연도의 평균 매출액이 3000억원 미만인 중견기업, 조세특례제한법 시행령상 신성장·원천기술 보유 기업, 기술평가 상위 50% 기업 등에 한해서는 최대 10%까지 사전투자가 허용됐다.
특히 한국투자증권은 상장 전 지분 투자에 적극 나섰다.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사례들도 속출했다. 2022년 8월 상장한 새빗켐의 경우 한국투자증권은 상장 전 10억5600만원을 들여 4.2%의 지분을 확보했고 37억4500만원 규모의 신주인수권 행사 등 총 48억원을 투자했다. 그리고 상장 후 매매차익으로만 187억원을 남겼다. 이를 본 다른 증권사들도 상장 전 지분 투자를 적극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대다수 증권사가 상장 전부터 IPO 기업들의 주식을 공모가보다 훨씬 싸게 사들인 다음 상장시키고 있다.
증권사들은 현행 규정상 상장 전 취득한 지분의 가격과 실제 공모가의 괴리율이 50% 이상일 경우 6개월, 50% 미만이면 1개월 동안 의무 보유해야 한다. 하지만 증권사 입장에서는 안전마진이 충분하기에 상장 전 투자로 손해 보는 일은 드물게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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