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경영·인사 모든 분야 ‘솔선수범’… 공간대여→공연제작 ‘극장 판’ 바꿨다[Leadership]
1984년 예술의전당 1기 입사
‘제작극장’ 설계과정 전부 챙겨
공연장 찾는 관객 욕구에 ‘공감’
실내·교향악 시설 과감한 투자
직원과의 대화무기는 ‘솔직함’
부하가 아닌 ‘동업자’로 생각
극장의 연간 공연일정을 보면 그곳이 어떤 극장인지 보인다. 자체 기획공연으로 관객을 기다리는 ‘제작극장’이 있는가 하면, 외부 제작사에 무대를 내주고 요금을 받는 ‘대관극장’도 있다. 제작극장은 걸작이 될지 모를 작품들의 싹을 틔우는 요람과 같은 곳이다. 살면서 언젠가 한번은 봐야 한다고 꼽히는 작품들은, 그 극장의 극단·무용단·오페라단 등이 ‘레퍼토리’로 수차례 공연을 거듭해 다듬은 결과물이다. 걸작 레퍼토리를 갖춘 제작극장은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그 사회의 예술 저변을 넓힌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대관 일색이던 한국 공연계에서 제작극장을 구축한 ‘전환 리더십’을 보여준 인물이다. 국립중앙극장에 레퍼토리 체계를 도입한 데 이어, 세종문화회관의 체질까지 제작 중심으로 바꿔놨다. 안 사장이 이끈 동안 국립중앙극장과 세종문화회관 모두 관객 수가 크게 늘었고 수익구조도 공연수입 위주로 재편됐다. 대관 위주이던 ‘극장판’에서 제작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올해 9월 안 사장은 3년의 임기를 채웠지만, 임기가 1년 더 연장됐다. 사장 임기가 늘어난 것은 세종문화회관의 1978년 개관 이래 처음이다. 공연예술계 경력 40년째를 맞는 그의 리더십을 들여다봤다.
◇극장 뼛속까지 아는 대표 = 1984년 공채 1기로 예술의전당에 들어간 안 사장의 첫 업무는 공연장 신축이었다. 1988년 음악당·서예관, 1990년 한가람미술관·자료관, 1993년 오페라극장 등 개관뿐 아니라 경영·행정·인사 업무도 챙겼다. 그는 “예술 조예가 깊고 인맥도 넓은 입사 동기를 보며 주눅 들어 있기도 했고, 경영본부 업무가 마음 편했다”고 돌이켰다. 다만 제작극장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다. 당시 안 사장이 만난 미국 건축가는 “제작극장을 지을 건가”라고 되물었는데, 그 의미를 이해한 이가 한국 쪽에 없었다고 한다.
안 사장은 제작극장을 박물관에 비유했다. 전시물을 보관하는 수장고가 박물관 필수 공간이듯, 자체 연습실과 설비 창고가 제작극장에서 필수다. 설계부터 일반 극장과 다르다는 것이다.
안 사장이 극장장으로 재직한 국립중앙극장의 대대적 리모델링을 단행한 데는 그런 경험이 뒷받침됐다. 객석 집중도를 위한 경사 조절과 시야 확대, 최적 잔향시간(연주 소리가 실내에 머무는 시간) 확보를 통한 실내악·교향악 환경의 개선 등에 과감히 투자한 것은 극장 설계를 아는 리더였기에 가능했다. 안 사장은 “극장을 짓고 운영하는 것까지 한 바퀴를 돈 셈”이라고 했다. 서울 여의도에 들어설 ‘제2세종문화회관’도 뮤지컬, 오페라, 발레뿐 아니라 대형 전시에서도 최적 환경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조성되고 있다.
◇관객의 욕망을 아는 극장 = 1994년 안 사장은 예술의전당 경영본부에서 공연본부로 이동했다. 첫 담당 작품은 호주의 어린이극단 REM이 내한 공연한 ‘소녀 와얀의 모험’이었다. 일이 당장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극장 경영만 알았지 공연 기획은 몰랐던 안 사장이 ‘공연 베테랑’ 직원들 틈에 껴들기는 어려웠다. 표 판매라도 하자 싶어 영어학습지 방문교사, 학부모들이 모인 곳을 찾아다니며 학생에게 도움되는 영어 공연이라는 점을 집중 홍보했다. 꽉 찬 객석을 보고 놀란 그는 관객들의 방문 경위를 파악하고 또 놀랐다. 자신의 홍보 전략이 먹혀서 매진된 게 아니었다. 안 사장이 뛰어다니지 않은 지역에서 극장을 찾아온 이들이 너무 많았다. 자녀 교육, 단순 과시 등 각양각색의 이유들이었다.
“극장이 꼬신다고 관객이 오는 게 아니구나. 공연을 보는 데는 저마다의 구체적 이유가, 욕망이 있구나.” 안 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돌이켰다. 그날 이후 공연 프로듀서로서 안 사장은 관객의 욕망, 즉 수요 중심의 기획을 해 왔다. ‘이 시대 관객은 어떤 공연을 보고 싶을지’가 중심이다. 세종문화회관이 현대의 공연예술가를 발굴해 함께 기획하는 ‘Sync Next(싱크 넥스트)’가 패키지 단위로 관람권을 완판한 것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종문화회관 소속 서울시발레단이 ‘국내 최초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으로 틀을 잡고 올해 창단한 것도 마찬가지. 클래식 위주였던 발레 수요층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극장 대표와 말단은 동업자 = 뚜렷한 성과에는 그 이상의 노고가 있다. 조직 비전을 제시한 리더는 그 구현을 위한 노고를 떠안을 조직원들을 설득하고 움직여야 한다. 부하직원들과의 소통법 얘기가 나오자 안 사장은 용어부터 정정했다. “그게 아니라 동업자라고 생각해요.” 직원에게 힘든 점을 묻기에 앞서 안 사장은 본인의 입장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세종문화회관 한 관계자는 “너무 많이 솔직해서 놀랄 때가 있다. 직원이 사장에게 다가갈 수 있게끔 마음이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고 전했다.
30년 전 공연본부로 발령받았던 안 사장은 당시 직급이 차장이었지만 공연 업무는 부서 말단을 보며 새로 배웠고 지금까지 고마워하고 있다. 그 이후도 공연마다 전에 없던 위기를 넘으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직업 특성상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늘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죠. 위험을 같이 감수해야 하는, 동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종민 기자 rashomon@munhwa.com
오페라극장서 조용필 콘서트, 국립극장서 18금 공연… ‘대중 취향저격’
■ ‘자타공인 흥행PD’ 안 사장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자신의 직업 정체성을 요약하는 키워드로 ‘프로듀서’를 꼽는다.
예술의전당·국립중앙극장·세종문화회관 등의 대중의 이목을 끈 숱한 공연들이 안 사장의 손을 거쳤다. 그중 4개 작품을 꼽았다.
‘조용필 밀레니엄 콘서트’(1999년 12월 10∼12일). 클래식 음악이 독점하고 있던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벽을 대중음악으로 허문 공연이다. 당시 예술의전당 공연사업국장이던 안 사장의 기획이었다. 공연계 반대는 물론 조용필조차 부담스러운 논란을 우려했지만 안 사장이 설득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7년 연속 공연으로 이어졌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4년 6월 11일∼7월 6일 초연·연출 고선웅). 국립중앙극장에서 창극 최초로 ‘18금’(18세 이하 관람 금지) 공연을 표방했다. 판소리 ‘변강쇠타령’을 여성 옹녀를 주인공으로 다시 창작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충족해 2014년 ‘차범석희곡상’을 받은 것도 창극 최초였다. 올해 10주년 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무(佾舞)’(2022년 5월 19∼22일 초연·연출 정구호). 종묘제례악의 춤을 현대화한 작품이다. 안 사장은 국립무용단의 흥행작 ‘향연’과 ‘묵향’ 등 제작을 함께했던 정구호와 다시 뭉쳐 세종문화회관의 대표 레퍼토리로서 ‘일무’를 기획했다. 지난해 7월 미국 뉴욕의 링컨센터 공연 등 해외 진출로도 관심을 모았다.
‘Sync Next(싱크 넥스트)’ 시리즈(2022년∼). 올해 3년 차를 맞은 ‘싱크 넥스트’는 현대성과 실험성 등이 돋보이는 예술가들과 함께 그동안 보지 못한 장르를 매년 선보여 왔다. 여름철을 꽉 채운 프로그램 중 세종문화회관의 자체 기획 비중을 70%대로 끌어올려 제작극장으로서 정체성까지 살렸다.
△1959년 충북 보은군 출생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학사·단국대 공연예술학 석사·상명대 공연예술경영학 박사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2007∼2011년) △국립중앙극장 극장장(2012∼2017년) △세종문화회관 사장(2021년∼현재)
서종민 기자 rashom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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