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건넌 ‘4B 열풍’의 의미…여성들의 한미동맹이 겨누는 것 [정지혜의 빨간약]
“여러분, 우리(미국 여성들)는 한국 여성들이 했듯 4B 운동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출산율이 추락하도록요. 남성들에게 마지막 웃음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반격이 필요해요.”
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확실시 된 지난 6일 한 X(구 트위터) 계정이 영어로 이런 글을 올렸다. 약 3일간 조회수 2000만여 회, 좋아요 47만여 개가 쌓였다.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에 돌아온다는 사실이 결정된 지 하루 만에 20만명이 구글에서 ‘4B 운동’을 검색했다고 한다.
트럼프 시대의 귀환은 한국의 급진적인 페미니즘 운동을 미국 사회에 소환했다. 단 며칠이면 충분했을 정도로 빠르게 적신호가 켜졌다. 위기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성범죄 전력이 있으며 안티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낙태권에 반대하는 이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미국 여성들은 임신 중단 권리를 헌법적으로 인정받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49년 만에 폐기되는 광경을 2022년 목도한 바 있다. 이는 중대한 전조 증상이었고, 이후 우려했던 일은 하나 둘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대선에 이어 이번에도 표심을 가를 주 요소로 낙태권이 지목됐는데, 그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점은 4년 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한다. 미국에서도 30대 이하 연령대에서 남성 극우화 및 여성혐오가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는 진단들은 배경 설명을 더해준다. 트럼프를 키우는 이들이 늘어나고, 힘을 얻은 트럼프가 다시 이들에게 효능감을 제공하는 ‘트럼피즘의 악순환’이 사회의 표준으로 더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 미국 여성들이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움직임에 주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생식권(출산 여부를 여성이 결정할 권리)을 비롯한 여성 인권의 후퇴가 본격화 된 미국의 미래는 현재의 한국 사회와 비슷할 테고, 이에 대항하는 한국 여성의 행보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4B 운동은 한국 여성의 페미니즘 실천 중 최근 가장 활발한 방안의 하나다. 4B란 ‘아닐 비(非)’라는 한자의 음가를 따 4가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남성과의 결혼·출산·연애·성관계 없는 생활양식을 의미한다. 다만 이는 남성과의 개인적인(친밀한) 관계맺기에 한정되는 것이지 공적인 관계나 사회활동 자체를 안 한다는 것이 아니다.
유래를 찾아보면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인 2015년 전후로 한국의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 등에서 비혼, 비출산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2017년쯤 여기에 남성과의 데이트, 성관계까지 갖지 않겠다는 의미가 더해져 4B가 됐다.
4B의 핵심은 ‘남성과 함께하는 여성’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경험이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는 양태는 두 갈래 정도로 나뉜다. 4B를 하나의 사회 운동처럼 적극적인 남성 불매를 하는 것으로 실천하는 유형이 있고, 여성이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을 우선 순위에 둠으로써 인위적인 남성 파트너 찾기(ex. 결혼 활동)에서 멀어지는 등 남성을 의식하지 않게 된 유형이 있다. 전자로 시작해 후자로 옮겨가는 이들이 많고, 지금의 젊은 세대는 상당수가 처음부터 후자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혼을 하고 싶지만 못하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생애 과업으로 고려하지조차 않는 첫 여성 세대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사회 운동으로서의 4B는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 사회에서 남성과의 관계가 여성에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했다. 그래서 이들은 ‘남성 없는 삶’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 저항하며 맞서 싸우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남성의 여성 대상 폭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은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4B를 실천하면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가부장제의 작동은 남성 가부장과 함께 여성 역시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가능하다. 4B는 이것을 하지 않는 생활양식인 탓에 매우 개인적인 실천이면서도 사회 운동으로서의 효과를 갖는다. 가부장제에 대한 의미 있는 유효타이자,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움직임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여성의 4B 운동이 해외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틱톡에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보이 소버’ 트렌드에서 드러난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깨어남을 의미하는 소버(sober)라는 단어가 사용된 점이 흥미롭다. 소모적이고 자신을 취약하게 만드는 남성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일정 기간 ‘제 정신’으로 살아보면 그동안 자신이 갈구했던 남성이나 남성의 인정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게 주 논리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보이 소버 후기를 들려주는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에게 “1년만 남자를 끊고 살아보라“고 당부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 특별한 경험은 여성들에게 자신이 진짜 원했던 것이 ‘그 남성’이라기보다 그에게 투사된 자기 자신의 온갖 욕망이었음을 알려준다. 남성과의 관계에서 정신적으로 허약해졌던 상태에서도 회복됐다고들 말한다.
4B나 보이 소버의 초점은 남성을 거부하는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잃어버렸거나 지워져 있던 여성 자신을 되찾는 데에 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남고 적응하기 위해 여성들은 스스로를 돌보는 것보다 죽이는 일에 더 익숙하며 여기에 점점 무감해진다. 이를 직면한다면, 자신을 사회에 맞춰내려 한쪽으로 치우친 힘을 재조정하고 회복할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여성들의 시도 앞에서 “무작정 남성을 혐오하는 여자들”이라고 폄하하는 건 번지수 틀린 불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B를 지향하며 보이 소버 중인 여성들에게 남성은 혐오보다는 무관심의 대상이다. 과거에 그러지 못했다면 인위적으로 소버 기간을 거치며 이런 상태를 연습하고자 한다. 이들은 남성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타협하고 희생시켰던 자신의 자긍심을 돌려놓는 일부터 하겠다고 결정한다. 그런 후에 진정으로 나의 가치를 깎아먹지 않는 관계일 때만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관계가 가능한데도 자신을 억누르며 남성을 피하고 다닌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가능한 남성이 없을 때 자신의 기준을 낮추거나 타협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상황에도 주어진 선택지 속에서 떠밀리듯 결정하지 않는 태도를 기본적으로 갖는 것 말이다. 즉, 여성이 성적 욕망 등에 보수화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원한 건 이것’이라고 강요당한 거짓 욕망을 벗어내는 것에 가깝다.
물론 이는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삶의 우선순위로 둘 경우엔 불가능한 일이다. ‘남성과 함께하는 삶’이 필수일 때는 제한된 시간 내에 어떤 남성이든 고르지 않으면(혹은 남성에게 선택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적정하다고 보는 ‘혼기’, 생물학적으로 더 유리한 ‘가임기’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상 마감 시한이 정해져 있다. 최선이 아니더라도 차선에 만족하는 현명함이 종종 요구되는 이유다. 마감을 놓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세계관에선 그렇다.
전통적 여성의 생애 과업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들은 이 모든 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이 4B의 묘미다. 4B의 존재를 알든 모르든, 명시적으로 선언하든 아니든 이렇게 살아가는 여성은 증가하고 있다. 남성을 찾아 헤매지 않는 이들은 그저 담백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갈 길을 갈뿐이다.
여성이 남성을 만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겠다는 것이 급진적인 운동으로 취급되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번지르르한 말을 갖다 붙여도 결국은 ‘감히’ 남성을 거부하는 여성에 대한 괘씸함이 묻어난다. 이는 여전히 여성의 선택권이 남성과 동등하게 존중받지 못하는 성차별적 현실을 방증한다.
미국에서 한국의 4B 운동을 수입해오겠다고 하자 자국 남성들의 반응은 매우 즉각적이고 격렬했다. 남성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도태된 여성의 정신승리라고 조롱하거나, 그런 식의 극단적인 행동은 낙태권을 더 박탈시킬 것이란 협박도 일삼았다. 분노한 남성들의 여성 대상 폭력이 더 심각해질 것이란 우려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4B에까지 다다른 미국 여성들은 어차피 ‘갈 때까지 간’ 상황에서 이 정도로 흔들리지는 않는듯 보인다. 4B를 철회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안전을 더 철저히 지키기 위한 대비, 서로간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관측된다.
트럼프의 당선 직후 SNS에는 “너의 몸은 내가 결정해(Your body, my choice)”라는 해시태그가 부상했다. 낙태권을 주장하는 여성들이 “내 몸은 내가 결정해(My body, my choice)”라고 했던 것을 조롱하며 이번 대선에서의 성별 대결 승리를 자축하는 남성들의 세리머니(축하 의식)다. 출산하는 몸은 오직 여성의 것이므로, 이 구호에서 ‘너’와 ‘나’는 명백히 ‘남성’과 ‘여성’이다. 또래 여성을 향해 이 같은 적의를 보내는 남성은 정말 일부에 불과할까. 한때 이를 순진하게 믿었던 여성들은 그 환상으로부터 깨어나고 있다.
4B가 언급된 전후로 한국과 미국에서 나타난 거센 페미니즘 백래시(반발 작용)는 역설적으로 남성 보이콧의 효과를 증명한다. 가부장제의 존속 자체를 겨누는 직격탄은 지금껏 없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 운동이 반짝 하고 사라질지 지속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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