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플라타이아 전투…페르시아 전쟁의 마지막 전투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이번에 팀을 이끌고 그리스 답사를 하면서 플라타이아를 다녀왔다. 현장에 와 보니 기록으로는 이해가 안 되던 이 전투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이 한 번에 풀렸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에서 최대 규모의 침공은 기원전 480년 크세륵세스의 침공이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군 규모가 100만 명이었으며, 이 숫자는 과장이 아니라 절대로 올바른 정보라고 단언했다. 그래도 현대 역사학자들은 믿지 않고 있지만, 사상 유례없는 대군이었던 건 분명하다.
크세륵세스의 침공은 2번의 큰 전투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테르모필라이 협로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지휘하는 스파르타군 300명은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3일간을 저지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살라미스에서는 데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수로로 유인해서 수장시켜 버렸다.
살라미스의 대승리로 페르시아 침공은 끝난 것 같지만, 실은 아니었다. 크세륵세스는 귀국했지만, 매부 마르도니오스에게 그리스 전역을 맡겼다. 페르시아 육군은 아직 건재했고 그 병력은 적어도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30만 명이나 되었다.
마르도시우스는 신중하게 행동한다. 살라미스까지 페르시아군의 패인은 너무 서둘렀다는 것이었다. 마라톤 전투의 패배와 테르모필라이의 졸전은 페르시아군에게 중장보병이 없었던 탓이었다. 길이 좁고 산악지형이 많은 그리스 땅에서 기병과 궁병만으로는 승리를 거두기 힘들다. 반드시 중장보병이 있어야 했다.
살라미스 해전의 패전도 예상된 것이었다. 크세륵세스는 함대는 무한정 늘렸지만, 함대가 휴식할 항구가 없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풍랑으로 절반을 잃었고, 남은 절반을 좁은 수로에 몰아넣었다가 그리스군에게 패했다.
마르도시우스는 그리스 중북부 보이오타이아 지방에 주둔하면서 이 지역 폴리스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전부터 보이오타이아 이북 지역의 군대는 거의가 페르시아에 부역했었다. 페르시아에 저항하는 지역은 남부,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반도 주변과 스파르타가 위치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폴리스들이었다. 마르도시우스는 일단 그리스를 삼등분해서 중북부를 장악하고, 항복한 폴리스들로부터 중장보병을 차출했다.
심지어 테르모필라에에서 스파르타군과 함께 저항했던 포키스도 1000명의 중장보병을 마르도시우스에게 보냈다. 자신감을 얻은 마르도시우스는 기원전 479년 테베로 입성했다. 여기서 병력을 정비한 마르노니오스는 먼저 아테네를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각 동맹군을 이끌고 마르도시우스를 저지하기로 한다. 양측의 군대가 만난 곳은 테베 서남쪽의 작은 폴리스인 플라타이아였다.
플라타이아는 아티카, 펠로폰네소스, 보이오타이아로 가는 길이 교차하는 삼각지 같은 곳이었다. 양측의 병력이 조우하기 딱 좋은 곳이다. 살라미스 해전에 가려졌지만, 이 전투는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 주력군이 정면 대결을 벌인 페르시아 전쟁 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다.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 도심 북쪽 아소포스 강 건너편 평원에 진을 쳤다. 고대 플라아티아는 현재 폐허 상태로 남아 있는데, 덕분에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있다. 아소포스강은 작은 개천 같은 물줄기로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물줄기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플라타이아 북쪽에 땅이 파도치듯이 살짝 융기하는데, 그 일대였을 것이다.
그리스군은 플라타이아 남쪽 키타이론 산에 진을 쳤다. 이곳의 산기슭 비탈에는 현재의 플라타이아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스군의 위치는 지금 마을과 집들이 있는 지역이었음이 틀림없다.
페르시아의 장기는 기병이고, 그리스군의 장기는 중장보병대이다. 언덕 비탈에서는 그리스군이 유리하고 평원에 내려가면 기병대의 밥이 된다. 페르시아군도 항복한 폴리스 군대가 있지만 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었다. 결국 승부는 기병과 중장보병의 대결로 압축된다. 극과 극의 상성을 가진 두 군대는 서로 노려만 보고 있었다.
선수를 친 건 페르시아군이었다. 기병도 비탈에서 싸울 수는 있다. 정면 돌파는 힘들지만 가까이 달려와 투창을 던지고 돌아나가는 히트 앤드 런 전술로 소모전을 강요할 수는 있다. 그리스군 입장에서는 앉은 채로 괴롭힘을 당하고 소모되기보다는 나가서 싸우자고 할 수도 있고 철수해 버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페르시아군에겐 고마운 일이었다.
페르시아군 기병들은 조를 짜서 차례로 그리스군을 치고 빠지는 차륜전으로 괴롭혔다. 그리스군은 산기슭 아마도 2~3부 능선에 폴리스별로 위치를 잡고 전체적으로는 반원형으로 포진해 있었을 텐데, 이럴 경우 기병의 타겟이 되는 지역이 반원의 아래쪽 평지와 만나는 부분이다. 이날 불운하게 이 지역에 주둔한 부대는 메가라 부대였다.
몇 번의 공세를 맞자 메가라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지휘부에 통보한다. 아무도 도우려 가지 않는데, 아테네군 300명이 자원했다. 메가라는 살라미스 북쪽 아티카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폴리스이다.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메가라를 두고 격전을 벌인다. 그만큼 아테네에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그리스군이 중장보병대가 주력이라고 하지만 중장보병대만 있던 건 아니다. 궁병들도 있었다. 기병돌격에 저항하는 유일한 수단이 궁병이었다. 몇 차례 공세를 하면서 페르시아 기병들은 방심했던 것 같다. 메가라군이 와해되어 가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기병들은 투창 세례를 퍼붓고 말을 돌렸다.
이때 기병 지휘관인 마시스타오스가 말을 돌리지 않고 잠깐 머물렀다. 아마도 메가라군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순간 그의 말이 화살에 맞았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말이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마시스티오스가 말에서 떨어진다. 페르시아 기병들은 모두 뒤돌아서 돌아가고 있어서 사령관이 낙마한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리스 보병들은 즉시 뛰쳐나가 그를 죽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시아 기병은 사령관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전원돌격을 감행했다. 이를 보고 나머지 그리스군도 모두 달려 나갔다. 시신을 찾아야 하니 기병대는 투창이 아니라 백병전을 감행해야 했을 것이고, 그리스 중장보병들은 그 편이 더 좋았다. 페르시아군이 패배한다. 평지를 넓게 활용해서 유연하게 싸웠다면 페르시아군이 승리했겠지만, 시신을 되찾는다고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던 것 같다.
그리스군은 평지에서 기병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페르시아 기병의 지휘통제, 전술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게다가 플라타이아 평원은 평원이긴 하지만 물결치듯이 경사들이 있어서 기병들이 자유자재로 기동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최고 수준의 기병들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마르도시우스의 기병들은 그런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용기를 얻은 그리스군은 산에서 내려와 전진한다. 우익은 스파르타군으로 1만 명, 순 스파르타인은 5000명이었다. 또한 중장보병 1인당 7명의 경보병이 달려 있어 총 3만 5000명의 경무장 헤일로타이가 있었다. 여기에 테게아군 1000명, 코린토스군 5000명, 아르카디아인 600명, 시퀴온군 3000명 등등 해서 헤일로타이 제외하고 총 3만 3700명으로 모두 중장보병이었다. 이외에 경무장 보병은 6만 9500명이었다.
좌익은 아테네군이 지도했다. 그리스군 총병력은 11만 명이었다. 페르시아군은 30만 명이고 여기에 페르시아에 항복한 동맹군 병력이 더해져 있었다. 이 수치는 과장이라고 해도 대략 비율은 같다면 페르시아군이 3:1 정도로 우세했다.
이곳 지형으로 보면 그리스군은 플라타이아 서북쪽 얕은 경사 지대에 주둔했을 것이다. 양측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해서 10여 일간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페르시아군은 초조했다. 장기주둔이 부담이 되고, 용기를 얻은 그리스군이 계속 증강되는 것이 불안했다. 북부 폴리스군이 배신할 수도 있었다. 만약 테베가 변심한다면 이들은 완전히 배후가 끊기고 고립되게 된다.
한편 그리스군은 기병대의 파상공세와 물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결국 물이 있고,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개천과 지형이 진을 잘 보호해 주는 플라타이아 앞으로 진의 위치를 옮기자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군이 반대하자 스파르타군은 동맹군을 이끌고 단독으로 이동했다.
페르시아군이 스파르타군의 이동을 알아차린다. 페르시아군에겐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평원에서 이동 중인 스파르타군을 페르시아 기병이 습격했다. 아테네의 지원을 막기 위해 페르시아편 중장보병대를 아테네 진영 앞으로 보내 싸움을 걸었다.
공식대로라면 스파르타 군은 섬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플라타이아는 완전히 평원은 아니었다. 약간의 경사진 곳이 곳곳에 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스파르타군은 가능한 비탈로 이동해서 기병에 맞섰다.
현재도 플라타이아 유적 앞에 물이 솟는 샘과 작은 하천이 있다. 이 주변이었다면 플라타이아 성채로 인해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군을 포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면과 측면공격만 가능했다.
양측에게 다 불완전한 평원과 미미한 경사였다. 그들은 이런 지형에서 싸워본 적이 없고, 어느 쪽이 얼마나 유리한지 알 수 없었다. 결과는 스파르타군의 승리였다. 그제사 자신감을 얻은 스파르타군은 마르도시우스의 본진까지 쳐들어갔다. 마르도시우스와 주변의 경호대는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들 모두가 전사하고 페르시아군은 대패한다. 아테네군도 좌익에서 승리했다. 놀랍게도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 전사자는 스파르타 91명, 아테네군 52명뿐이었다.
이 전투는 한마디로 양측 다 자신의 전술은 알아도 그 전술이 시행되는 현장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몰랐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게임에서 전투력 수치는 아는데, 지형 변수와 결합했을 때 어떻게 바뀌는지 모르는 경우와 같다. 물론 마르도시우스의 기병들의 전투의지와와 능력도 저급했던 건 분명하다. 한니발 휘하에 있던 누미디아 기병이었다면 승부는 스파르타의 완패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 전투를 끝으로 페르시아 전쟁은 종결된다. 하지만 자신들의 몰랐던 능력을 깨달은 그리스군은 기병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났고, 이제 역으로 페르시아 정복을 꿈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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