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화장품까지 타깃… 행동주의 펀드 공격 10배 급증
지난 6일 미국 달튼인베스트먼트가 화장품 기업 한국콜마의 지주사인 콜마홀딩스 지분 5.02%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했다. 달튼은 올 초부터 지분을 사들여 오다가, 상장사 주식 5% 이상을 매입하면 공시해야 하는 ‘5% 규정’에 따라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달튼은 투자 목적을 ‘단순 투자’로 밝혔으나, 업계에선 조만간 주주 환원 확대를 앞세운 행동주의 운동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달튼은 2019년 현대홈쇼핑, 2020년 삼영무역, 2022년 SK그룹을 상대로 ‘주주 환원 확대’를 요구한 전례가 있다.
그 이튿날인 7일 KT&G는 국내 행동주의 펀드 플래쉬라이트 캐피탈 파트너스(FCP)의 투자 의향서를 사실상 거부하는 회신을 보냈다. FCP는 지난달 KT&G 경영진에 자회사 KGC인삼공사 지분의 100%를 1조9000억원에 인수하겠다는 일방적 투자 의향서를 보낸 바 있다. 인삼공사를 매물로 내놓지도 않았고, 불과 1년 전 KT&G가 3대 핵심 사업으로 키우겠다고 발표했는데 FCP가 ‘실적이 악화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느닷없이 인수를 제안한 것이다. KT&G는 “당사와 주주들, 시장에 혼란을 초래하지 않도록 유의해 달라”고 회신했다.
◇3~4세 경영 대기업 겨냥… 행동주의 펀드 공세
내년 주주총회 철을 앞두고 행동주의 펀드들이 본격적 움직임에 나서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는 특정 기업 주식을 대량 매수한 뒤, 기업 의사 결정에 영향을 끼쳐 이익을 추구하는 펀드를 뜻한다. 이사회 구성을 바꾸라 요구하고, 주주총회에 안건을 제안하거나, 위임장 대결을 하겠다고 선언하며 협상에 나서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 경영에 개입한다.
행동주의 펀드의 한국 기업 공격은 2019년 8건에서 지난해 77건으로 급속히 느는 추세다. 한국 대기업들이 3~4세 경영으로 넘어가면서 지분이 잘게 나뉘는 데다, 상속세 부담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가 부양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정면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외국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이사회, 상호 출자처럼 상속을 염두에 둔 복잡한 지배 구조 등이 기업 저평가 원인이라고 보고 공세에 나서고 있다.
실제로 최근 한 달 새에만 영국 팰리서캐피탈과 한국의 얼라인파트너스가 각각 SK스퀘어와 두산밥캣의 지분을 1% 이상씩 확보하고 주주 가치 향상 방안을 요구하고 나섰다. SK그룹의 중간 지주사인 SK스퀘어는 반도체 기업 SK하이닉스의 지분 20%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두산밥캣은 자회사 합병 추진 과정에 쓰려던 1조5000억원을 주주 환원용으로 돌리라는 요구를 받았다.
증권가에선 행동주의 펀드들이 표적으로 삼을 법한 종목만 모은 주주 환원 관련 상장지수펀드(ETF)에 돈이 쏠리고 있다. 한국투자신탁이 운용하는 상품은 올 들어 수익률 22.4%를 기록했는데, 세아제강지주, 영원무역홀딩스, 더블유게임즈 등이 포함돼 있다.
◇중견·중소기업도 ‘미래 투자’ 못 하고 ‘경영권 방어’
재계는 행동주의 펀드들이 자체 연합을 꾸리거나, 소액주주들과 연대할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핵심 안건이나 경영권 분쟁 상황에서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3월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선 행동주의 다섯 펀드가 결합해 자사주 5000억원 매입과 주당 4500원으로 배당 늘리기를 안건으로 올렸다가 부결되기도 했다.
재계에선 단기적 기업 성과에 집착할 경우, 중장기적 기업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근 한국경제인협회가 행동주의 캠페인을 겪은 미국 상장사 970곳을 분석한 결과, 단기적으로는 기업 가치가 일부 개선됐지만 4년 뒤엔 평균 1%포인트 하락하는 등 악영향이 나타났다. 재계 관계자는 “행동주의 펀드가 득세하면서 대기업뿐 아니라 우량 중견·중소기업들까지 제대로 미래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경영권 방어를 위해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지 않고 국내 기업들의 미래 먹거리 발굴에 쓰이게 할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행동주의 펀드
특정 기업 주식을 매수한 뒤, 의사 결정 과정에 개입해 중장기적 가치보다는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는 펀드.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구조 조정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소액주주 이익을 대변해 주주 환원에 기여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단기 차익을 주로 추구해 기업의 미래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비판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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