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反트럼프는 왜 트럼프에게 패했나

정지섭 기자 2024. 11. 1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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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철원

“들어보세요. 나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유형을 잘 압니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민주당 대선 후보직을 넘겨받은 지난 7월 지지자들 앞에서 이같이 말하자 청중은 환호했다. 해리스는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과 샌프란시스코 지방 검사 등 자신의 검찰 경력을 부각시키며 “여성에게 몹쓸 짓을 한 범죄자들, 소비자를 등쳐먹은 사기꾼들, 제 이익을 위해 법질서를 농락한 파괴자들처럼 온갖 종류의 가해자들을 다뤄봤다”고 말했다.

‘검사 출신 부통령’인 그가 대선 맞상대 공화당 트럼프 전 대통령을 처단해 정의를 실현할 것처럼 얘기하는 연설 동영상이 온라인에 확산됐고, 민주당 지지층은 환호했다. 바이든이 트럼프에게 판판이 지지율이 밀리며 빨간불이 들어왔던 대선 가도에 청신호가 켜진 것처럼 보였다. 이후 100여 일 동안 민주당과 해리스 진영은 반트럼프 정서 공략에 주력했다. 트럼프가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 등 네 건의 형사재판에 회부된 피고인임을 부각하며 ‘검사 대 범죄자’ 구도로 몰아갔다.

트럼프가 오하이오주의 아이티 이민자들이 주민들의 반려동물을 잡아먹는다는 허황된 주장을 하거나, 유세 찬조 연설자가 카리브해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를 ‘쓰레기섬’이라고 비하하는 등 논란을 일으키면 증폭·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유권자를 향한 메시지는 ‘왜 해리스를 찍어야 하는지’보다 ‘왜 트럼프를 찍으면 안 되는지’에 집중됐다. 이 같은 ‘악마화 전략’이 실패했다는 것을 4년 전, 8년 전보다 나빠진 민주당의 선거 결과가 보여준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내내 ‘지금이 4년 전보다 살기 좋으냐’며 서민들 생활고를 부각시켰고, 불법 이민자들에게 살해당한 여대생 가족을 만나며 이민 정책 문제를 이슈로 끌어올렸다.

‘그렇다고 트럼프를 찍겠느냐’라는 상대방 공세에 민생 문제를 앞세워 ‘그럼 이대로 살겠느냐’고 맞선 셈이다. 그렇게 ‘트럼프 대 해리스’가 아니라 ‘트럼프 대 반(反)트럼프’ 구도가 고착화된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는 ‘반트럼프’를 이겼다. 한국 정치 상황은 미국과 놀라울 정도로 동조하고 있다. 진영 간 분열·갈등으로 점철돼 ‘저 사람이 되는 건 못 본다’는 증오의 정서가 투표의 동력이 되면서 상대방에 대한 악마화가 일상화된 점이 그렇다.

집권 세력 대통령과 여당 대표는 엘리트 검찰 출신, 상대방 쪽 야당 대표 역시 법조인이라는 점도 유사하다. 야당 대표는 형사 피고인으로 1심 선고를 앞두고 있지만, 특검 추진 등 집권 세력이 처한 사법 리스크도 그에 못지않다는 점도 그렇다. 생활고와 범죄 공포 등에 직면한 국민들 아우성 속에 트럼프 재집권이라는 ‘퍼펙트 스톰’이 몰려오고 있다. 여야 모두 상대방의 리스크가 현실화하기를 학수고대하기보다 당면한 민생고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할지에 골몰했으면 좋겠다. 그 이상의 집권 플랜이 없다는 걸 이번 미국 선거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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