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율 “김건희 리스크 제기하자, 나는 좌파의 첩자가 되었다”
회계사 김경율은 몰라볼 만큼 살이 빠져 있었다. 김건희 여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빗대 곤욕을 치렀던 그는, 총선 후 본업으로 돌아가 주말이면 전국 팔도의 산을 오른다고 했다. 그는 “최근 들어 반갑게 인사하며 말 거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며 웃었다.
◇ 조국보다 나쁜 놈
-’김건희 리스크’를 가장 먼저 제기한 데 대한 인사일까?
“보수 지지자들은 위기 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당을 떠났는데도) 내 손을 잡고 ‘잘 해 달라’ 부탁하는 분들도 있다.”
-결국 김건희 여사 문제로 대통령 지지율이 곤두박질쳤고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타이밍이 너무 늦어진 게 아쉽다. 디올백 사건이 불거진 그때 바로 사과했다면 이런 위기는 오지 않았고, 총선 국면도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엔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에 사과했었다.
“사과는 했지만 내 발언을 후회한 건 아니다. 내가 없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 게 아니었다. 디올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건 당시 대통령실 내부 의견이자 국민의힘 다선 의원들의 일관된 목소리였다.”
-하필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해 파장을 일으킨 것 아닌가.
“프랑스 혁명이 자유·평등·박애라는 거대 이념으로 촉발된 게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선동, 거짓일 수도 있는 소문들이 파리 시민들의 정서와 감성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디올백 수수 건을 주가조작, 양평고속도로 의혹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려다 나온 말이다.”
-대통령실과 여당 모두 김건희 리스크를 우려했다면 왜 진작에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의문사’라는 표현을 쓴다. 여사에 대해 문제 제기한 참모들은 어느 날 갑자기 안 보인다, 짐을 싼다는 얘기를 대통령실 비서관에게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김건희 리스크’를 제기했다고 전면적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다. 얼마나 협량한가.”
-김정숙, 김혜경 문제엔 침묵하면서 김건희만 공격하냐는 비판도 받았을 텐데.
“윤석열 정부의 대표 공약이 공정과 상식이었다. 문재인 정부보다 더 잘하려고 집권한 것 아닌가. 김정숙, 김혜경과 물타기해서 김건희 리스크를 무마시키는 건 너무 짜치는 일 아닌가.”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 전후의 삶이 극과 극으로 달라졌다던데.
“비대위에 막 들어갔을 땐 당내 유명 중진들이 ‘대장동 스타’, ‘대선 일등 공신’이라 추켜세우며 꼭 한번 모시고 싶다, 식사 한번 하자는 전화를 매일같이 걸어왔다. 그러나 문제의 발언 이후 뚝 끊기더라(웃음). 극우 유튜버들에게 시달린 건 말도 못 한다. 최근 윤·한 회동에서 한동훈 대표가 극우 유튜버들 관리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던데, 내가 딱 그 심정이었다. ‘조국보다 나쁜 놈’ ‘내부 총질한 놈’이라고 욕하고 위협하며 아침저녁으로 따라다니는데, 공포심을 느꼈다.”
-김경율을 영입한 사람이 누군지, 금융감독원장으로 추천한 이가 누군지 색출하는 소동도 있었다.
“대선 때 윤석열 후보로부터 선대위원장 제의를 직접 받았다. 하다못해 신당 창당 등 정계 개편설이 나올 때조차 ‘우리와 함께해야 한다’는 연락이 대통령실에서 직접 왔다. 나를 금감원장 후보로 올리고 인사 검증까지 한 곳도 대통령실이다. 누가 나를 영입한 것인가.”
◇ 한동훈을 좌파로 오염시켰다?
-보수 지지자들 중에는 김경율이 한동훈을 좌파로 오염시켰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에 진보와 보수, 진정한 좌파와 우파가 있나? 내가 국민의힘 당헌 당규를 정말 열심히 읽었는데 민주당과 차이 나는 게 별로 없더라. 심지어 정의당과도 구분이 안 될 정도다. 그런데 국힘 지지하면 우파, 민주당 지지하면 좌파가 되어 죽자사자 싸운다. 정치가 산업화되어 적대적 공생을 하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과는 ‘개(犬)’ 설전을 벌였다.
“내가 정청래, 홍준표 같은 정치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치 본연의 목적, 나아가야 할 바를 희화화하고 정치를 편협한 전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과는 정상적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강형욱(개통령)씨가 답변하는 게 맞다고 한 것이다.”
-어쨌든 김경율의 ‘입’이 윤·한 갈등, 동반 추락의 시발점이 된 건 사실 아닌가.
“윤상현 의원이 당대표 출마 선언을 하면서 ‘국민의힘은 공동묘지의 평화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내가 비대위원 할 때 당내에서 가장 많이 들은 조언이 ‘말하지 말라’였다. 실제로 어떤 안건이 있으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토론도 없다. 대신 항상 듣는 말이 ‘하나 된 모습으로, 한목소리로 나가자’였다. 조폭 단합 대회도 아니고(웃음).”
-대통령실과 다른 목소리를 내니 배신자 소리 듣는 것 아닐까?
“비대위 시절 나는 노동 문제와 격차 해소에 보수가 적극 발언하고 파격적인 정책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음엔 아무런 저항도, 반발도 없더라.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 이후 확 달라졌다. 좌파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그때 알았다. 이들의 분노가 발화하는 포인트는 이념 혹은 가치가 아니라 대통령 심기에 있다는 것을.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에 대통령과 여사가 격노하자, 나는 즉시 좌파에서 온 첩자가 되었다.”
◇ 선수는 전광판 보고 뛰어야
-명태균 사건의 본질은 뭐라고 보나?
“비대위에 있을 때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났다. 명함을 주면서 자기와 대통령, 김 여사와 함께 국정을 이끌어보자는 사람도 있더라(웃음). 문제는 대통령 내외가 명태균 유의 망상증 환자들과 여러 차례 소통했다는 데 있다. 한두 번 얘기해보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왜 관계를 이어갔는지 의문이다.”
-명태균 입에선 여러 유력 정치인 이름도 오르내렸다.
“이런 사람에게 휘둘릴 정도로 우리 정치가 취약하다는 방증이다.”
-칠상시, 혹은 한남동 라인이 있다고 생각하나?
“칠상시, 십상시가 있다 해도 그들이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해 국정 방향이 올바로 나아갔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거론된 이들의 대부분은 공직에 있어본 적 없고, 공적 문제의식이나 윤리의식 또한 찾아볼 수 없더라. 그러니 ‘서울의 소리’ 같은 매체에 계속 당한 것 아니겠나.”
-대통령 사과와 기자회견은 어떻게 보셨나?
“전광판을 보고 뛰지 않았다는 말에 놀랐다. 야구장 전광판에는 아주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선발투수가 몇 개 공을 던졌는지, 속력은 얼마인지 등등. 선수가 전광판을 보고 뛰지 않았다는 것은 운전사가 속도계를 안 보고 달리는 것과 같다. 시속 60km로 달려야 하는 도로를 19km, 17km 지지율로 달리며 ‘돌을 맞아도 개의치 않겠다’고 한다면 국정이 어떻게 되겠나. 4대 개혁 또한 현재 상황을 알려주는 전광판을 보면서 속도를 조율해야 한다.”
-김 여사는 육영수 여사처럼 국정 조언을 한 것이지 국정 농단을 한 것이 아니라고도 했는데.
“김 여사는 조수석에 앉아 조언만 했을 뿐이라는 대통령 생각과 달리, 많은 국민은 김 여사가 핸들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 아닌가.”
-박근혜처럼 김건희가 여성이라서 더 악마화된다는 생각은 안 드나?
“나도 처음엔 선동이고 가짜뉴스라고 생각했다. ‘김건희 죽이기’라는 책도 있듯이 악마화되는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대다수 국민이 영상으로 시청한 ‘디올백 사건’에 즉시 사과해야 한다고 호소한 것이다.”
-대통령은 김건희 특검이 근거없는 정치 선동이라고 일축했다.
“나야말로 김 여사의 도이치 주가조작 의혹을 가장 열심히 쉴드 쳤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뭣보다 국민의 60~70%가 특검에 찬성한다. 김 여사의 국정 농단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으로 털고 가는 게 맞다.”
-민주당은 탄핵으로 가는 시동을 걸고 있던데.
“촛불 때와는 다르다. 당시엔 문재인과 민주당에 대한 기대치가 분명히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윤 대통령이 탄핵될 경우 그 대안이 이재명 대표이길 바라는 국민, 중도층이 얼마나 될까. 민주당이 원하는 방식으로 되진 않을 것이다.”
◇ 한국 정치는 ‘전쟁’이었다
-한동훈 대표와는 계속 연락하나?
“당대표 된 후로는 거의 안 한다.”
-총선 직후 대통령 만찬은 거부하고 진중권, 김경율은 만났다. 무슨 얘길 했나.
“당대표에 출마하지 말라고 했다. 대통령이 당을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 한동훈의 정치 커리어가 조기에 마감될까 우려했다. 현재까지는 기대 이상으로 잘 버텨나가고 있지만.”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한다는 점에서 한동훈은 윤석열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는데.
“조언 받는 인사들의 품을 넓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김웅 전 의원이 3선·4선·5선 한 국회의원들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칼이 있다는 뜻이다. 중진, 원로들 말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이재명 대표는 금투세 폐지 등 중도 확장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저 웃는다. 포퓰리즘을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민주당의 금투세 법안은 단군 이래 최대 공익사업이었다고 자랑하는 대장동 사업만큼이나 기만적이다. 개미 투자자들의 과세 폭은 대폭 넓힌 반면 대주주의 세율, 사모펀드 수익의 과세율은 낮춘 게 그 법안이다. 이해 세력과의 유착 없이 그런 법안이 나올 수 있겠나. ‘소득 있는 곳에 과세해야 한다’가 내 철학이지만 민주당의 금투세 법안은 맘 편히 반대할 수 있다.”
-짧고 굵게 경험한 정치판에 대한 소회가 어떤가?
“이청준 소설에 ‘너는 (국군과 빨치산 중) 어느 편이냐’ 묻는 대목이 있다. 21세기에도 우리는 ‘너는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 물어뜯으며 싸운다. 서로를 절멸시키려 악을 쓴다. 한국 정치는 은유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전쟁이었다.”
☞김경율
1969년 전남 해남 출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공인 회계사에 합격한 뒤 참여연대에 합류, 경제민주화운동과 재벌개혁운동을 했다. ‘조국 사태’ 후 참여연대를 탈퇴, 좌파의 위선을 비판했다. ‘조국 흑서’의 공동 저자로 ‘대장동 의혹’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을 지냈다. ‘회계사 김경율의 노빠꾸 인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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