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차선은 보수진영의 현명한 결단
‘잘못한 건 없지만, 미안하다. 사과했으니 넘어가자. 앞으로 더 잘할게.’ 윤석열 대통령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의 요지다. 모든 잘못은 휴대폰이 뒤집어썼다. 휴대폰을 교체하겠다는 게 주요 후속조치의 하나다. 윤 대통령 스스로 수사를 지휘했던 공천개입 건이 문제되는 시점에서 증거인멸이 될 수도 있다.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 후에도 비판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외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보수진영에서도 불만과 비판이 쏟아졌다. ‘진솔하고 진심어린 사과’라 자평하던 대통령실도 이런 반응을 감지해 일련의 후속조치를 내놨다. 그러나 후속조치조차 민망하다. 김건희 여사의 해외순방 동행도 임시 중단일 뿐이며, 특검은 또다시 거부하고 제2부속실 설치로 무마하려 한다. 인적쇄신도 ‘적절한 시기’에 하겠다고 한다. 이것이 ‘앞으로 더 잘할게’ 내용이다. 사과를 받고 더 기분이 나빠졌다는 국민이 적잖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치 선동’이나 ‘악마화’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미쳤냐’나 ‘무식하게’란 단어는 품격에 연연하지 않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윤 대통령의 스타일로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정치 선동’이나 ‘악마화’ 같은 단어들은 정치적 의미가 짙다. 야당을 비롯한 반대 진영을 염두에 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들은 상대를 타협이나 협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더 나아가 경쟁 상대로도 보지 않고 오로지 적으로 규정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 윤 대통령 스스로 극단적 사고를 갖고 상대 진영을 또 다른 극단으로 몰아 ‘악마화’하는 것이다. 정국을 더욱 양극화와 극단적 대립으로 몰아갈 수 있다. 상황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구체적이고 진정한 사과의 자리가 감정적 토로와 감성적 선동의 자리로 바뀌어 버렸다.
윤석열 정부 시기에 보수진영은 풍랑을 만난 배와 같다. 무능하고 독선적인 선장이 배를 무사히 운항할 수 있을까. 이미 위험하다는 판단은 보수진영 내에서도 커져가고 있다. 대통령과 그 핵심 참모들만 모르거나 애써 외면할 뿐이다. 우리 국민은 국민적 저항을 통해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도 두 번, 탄핵도 두 번 겪었다. 탄핵 트라우마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꿔 말하면 탄핵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은 탄핵과 퇴진도 강제할 수 있는 국민이다. 하지만 탄핵과 퇴진은 일정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고 국민들도 그것을 염려한다.
가장 좋은 것은 대통령 스스로 태도를 바꾸어 확실한 쇄신을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차선은 보수진영 내에서 현명하게 해결하는 것이다. 내부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선원과 배를 살리기 위한 당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탈리아의 과도정부 경험이 본받을 만한 사례다. 1990년대 이탈리아 정치의 지각변동 이후 이탈리아 의회는 위기관리를 위한 과도정부를 세 차례나 구성한 바 있다. 1992년과 1994년 사이에 두 차례, 1995년에 한 차례였다. 세 차례 모두 내각이 붕괴하거나 내각 스스로 해체한 후 새 내각이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립적인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위기 상황을 중립내각으로 해결해 나간 것이다. 앞의 두 차례는 주요 정당들이 모두 참가하는 거국내각 형태였지만, 세 번째 과도정부는 정당 정치인을 배제한 무소속 각료들로 구성되었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는 내각제이므로 대통령제인 우리나라 정부와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통령을 포함해 국무위원을 모두 교체해야 유사한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임과 동시에 국가 원수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 원수의 지위는 유지하되 행정부 수반의 권한은 과도정부의 국무총리에게 이양해 대통령은 의전상 역할만 수행하는 방식이 적절하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는 두 거대 정당의 대립이 심각하고 양당 모두 국민의 신뢰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의 사례처럼 무소속 각료들로 구성된 중립 과도정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당색을 띠지 않은 각 분야 전문가나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구성해 6개월 내지 1년 동안 비정치적인 행정부 업무를 수행하면서 차기 정부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별도의 독립기구를 구성해 비례대표제 확대와 내각제 도입 등을 비롯한 개헌 수준의 정치개혁도 준비해야 한다. 권력 구조와 제도의 문제도 다시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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