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학적 시간이 말을 건다…중문대포 주상절리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한겨레 2024. 11. 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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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냄과 덧댐을 조율한 경관 개선 디자인으로 제주 중문·대포 해안 주상절리대 모습이 거듭났다. 사진 황덕우(이내)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제주도의 대표적 지질 유산인 서귀포시 중문·대포 해안 주상절리대가 거듭났다. 주상절리라는 물질 경관 자체가 변한 건 없다. 더하기가 아닌 빼기의 디자인을 통해 경험 경관이 크게 달라졌다. 투박한 현무암 무더기 틈에 야생 해안 식물을 심은 검은 돌밭을 지나면 거친 소나무 숲이 나온다. 빽빽한 숲을 여러 각도로 통과하며 해안으로 향하는 날렵한 디자인의 관람로가 장쾌한 바다와 고요한 수평선을 산책자의 눈앞으로 당겨 놓는다. 조각도로 섬세하게 자른 듯한 주상절리의 수직 기둥들이 발아래와 몸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거센 파도가 쉼 없이 돌기둥 절벽에 부딪히며 길고 긴 지질학적 시간이 쌓인 경관을 조금씩 깎아낸다.

천연기념물 제443호인 중문·대포 해안 주상절리대는 약 25만년 전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류가 바다와 만나 형성됐다. 용암이 급격히 식으며 굳을 때 일어난 지질 현상과 해안 침식이 만들어낸 돌기둥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수직 절리(나란한 결로 갈라진 암석의 틈)의 절경이 관광 명소의 목록에서 빠질 리 없었다. 주차장은 늘 만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질 유산은 조연으로 밀려나고, 어수선한 매점과 가판대, 맥락 없는 테마 조형물, 둔탁하고 비좁은 목재 데크 탐방로, 무분별한 외래 식생이 주인공이 된 상태였다.

경관 개선 디자인 프로젝트를 5년 넘게 이끈 조경가 김아연(서울시립대학교 교수)은 주상절리를 “제주도의 지질학적 사건을 보여주는 기억이자 증거이며, 하나의 액체 상태 덩어리가 고체로 성상이 바뀌면서 발생한 틈의 경관”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틈은 빈 공간을 만들고 빈 공간은 새로운 생명이 점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지질학적 시간이 만든 틈새를 수평적으로 번역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검은 돌밭 공원 밑에는 25만년의 지질학적 시간이 쌓인 주상절리의 속살이 숨어 있다. 사진 임한솔

조경가의 해법은 ‘덜어내기’였다. 주상절리대 상부의 공원을 차지하고 있었던 뿔소라, 돌고래, 뗏목 조형물과 조악한 포토 스폿 시설물을 철거했다. 주상절리와 올레길을 가르는 담장을 낮췄다. 복잡한 패턴의 바닥 포장을 걷어내고 휴게시설은 간명하고 단순하게 바꿨다. 대신 검은 흙과 거친 현무암을 채운 검은 돌밭으로 공원을 채웠다. 여름에 휴면하고 겨울에 생장하며 개화하는 바닷가 여러해살이풀 암대극을 심었다. 응고된 용암 덩어리가 나올 때까지 흙을 파내 수직의 돌기둥으로만 보였던 주상절리의 수평면을 걷게 한다는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검은 돌밭 공원만으로도 그 밑 깊은 곳에 넓게 펼쳐진 땅의 속살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덜어내기 디자인의 힘은 새 관람로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통나무를 흉내 낸 육중한 목재 난간과 두꺼운 인조목 데크를 걷어내고, 날씬하고 간결한 검은색 철재 난간과 가볍고 미니멀한 하얀색 콘크리트 포장 데크를 새로 넣었다. 예리한 선형으로 이어지는 동선의 특정 각도에서는 난간의 살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래 있던 것과 새로 덧댄 것의 질료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어둡고 수직적인 절리와 밝고 수평적인 길을 강하게 대비시키자 원풍경의 아름다움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관람 동선을 연장해 몽돌 해안까지 조망할 수 있게 되자 서로 얽힌 지질학적 경관이 비로소 시각적으로도 연결됐다. 김아연의 말을 빌리자면, “지질 경관의 회복”이다.

관람로에 새로운 질료로 간결하게 디자인한 동선을 적용해 원풍경의 아름다움을 명징하게 드러냈다. 사진 유다연

25만년 전의 용암 분출, 냉각과 수축을 겪으며 응고된 지질 현상, 끊임없는 해식 작용이 서로 얽혀 만들어낸 초현실적 경관은 멀리서 바라만 보는 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는 거리를 취하고 경관을 관조하는 구경꾼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디자인이 개입되자 물질 경관이 경험 경관으로 번역됐다. 여전히 주상절리를 맨발로 걷거나 손으로 만지며 경험할 수는 없지만, 덜어냄과 덧댐이 섬세하게 조율된 관람로를 따라 걷다 보면 겹겹이 쌓인 시간의 경관에 그의 신체가 공감각적으로 감응한다. 경관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된 그와 무심한 지질학적 경관 사이에 몰입의 정동이 생겨난다.

경관은 구경꾼처럼 스쳐 지나가는 자에게는 추상적 공간이지만 자신의 신체로 감각하며 경험하는 참여자에게는 생동하는 장소다. 인문지리학자이자 환경미학자인 이푸 투안이 말하듯, 공간은 경험을 통해 장소가 된다. 투안은 사람이 장소와 맺는 정서적 유대를 ‘토포필리아’라 부른다.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에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를 붙인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이름을 달고 2022년 8월부터 이어온 지면을 이제 맺는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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