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요나 김 “바그너는 삼차함수…연출은 최고의 관객에게 부치는 편지” [인터뷰]
“하나의 작품은 살아있는 존재…
바그너는 삼차함수, 도장깨기 중”
2025년 소리악극 ‘심청’ 개막 예정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철제 컨테이너 안에서 가스통이 폭발하는 ‘노르마’, 샤넬 스타일의 트위드 투피스와 블랙 원피스를 입은 성악가들의 ‘라 트라비아타’, 지큐(GQ) 11월호 17페이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게르만 신들과 ‘K-팝 걸그룹’ 같은 요정들이 춤추는 ‘니벨룽의 반지’….
요나 김의 오페라엔 언제나 ‘지금, 여기’가 있다. 수세기 전 태어난 고전의 세계에 ‘오늘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공연장은 살아있는 곳이고, 동시대의 이야기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연출가의 시선은 시간 속에 박제된 오페라를 현재로 소환한다.
“고전에 새로운 호흡을 넣어 나의 시선으로 현대의 살아 숨 쉬는 관객에게 전달하고, 감정과 생각이 일어 담론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에요.”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독일 만하임국립극장 상임연출가)은 최근 한국에서 국립오페라단과 함께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올리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250분(인터미션 포함)에 달하는 그의 ‘탄호이저’는 중세성을 지우고, ‘현재의 이야기’로 관객과 만났다.
요나 김 연출가는 최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작품을 대할 땐 현재의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포인트를 떠올리고, 세계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는 교집합과 문제의식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가 작품을 마주하는 첫 단계에서의 일이다.
“하나의 작품을 펼치는 것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람, 새로운 존재를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작품 하나를 만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여는 것과 같다. 2~4시간에 달하는 한 편의 오페라를 만나는 동안 요나 김은 ‘미지의 존재’와 마주한다. 그는 “작품과의 만남은 살아있는 존재와의 조우”라고 했다. 새로 사귄 친구를 알아가듯 악보 한 장, 가사 한 줄을 소중하게 들여다 본다. 누구도 아닌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이 과정을 통해 작품 안에 그의 시선을 담는다.
요나 김 연출가의 무대는 방대하다. 독일 ‘오페라의 아버지’ 바그너부터 이탈리아 오페라의 상징인 푸치니,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로 불리는 벨리니는 물론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한 창작 오페라까지…. 어느 한 시대나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오페라를 섭렵해 왔다.
2005년 독일 부퍼탈 시립극장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자이데’로 유럽 무대에 데뷔한 그는 2017년 세계적인 오페라 전문지 ‘오펀벨트’가 시상하는 ‘올해의 최우수 연출가’로 선정됐다. 독일 최고 권위 예술상인 파우스트상엔 두 번(2010, 2020)이나 노미네이트된 명실상부 최정상 연출가다.
바그너 작품은 벌써 9번째다. ‘도장깨기’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바그너가 나를 찾아와줬다”고 말한다. 아직 만나지 않은 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뿐이다. ‘링’ 시리즈로 불리는 ‘니벨룽의 반지’는 독일 만하임국립극장에서 지난 2021년 초연됐고, 2022년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초청으로 한국 관객과 만났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링’ 시리즈를 올린 연출가는 극히 드물다. 지난해엔 독일에서 바그너의 처녀작인 ‘요정들’(Die Feen)도 올렸다.
요나 김 연출가는 “바그너는 삼차함수”라고 했다. 쉽게 풀리지 않아 더 재밌기 때문이다. 그는 “바그너만큼 감각과 정신이 동시에 요구되는 오페라가 많지는 않다”며 “오페라는 생각의 그림이다. 생각을 비주얼화해 보여주는 것인데, 바그너는 음악의 호흡이 길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많다. 연출가의 입장에서 더 흥미롭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바그너는 물론 동서양을 초월해 사랑받는 ‘라 트라비아타’, ‘사랑의 묘약’, ‘토스카’, ‘투란도트’ 등 다양한 작품을 만났으나, 모든 작품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매 작품을 마주할 때의 고민은 “수없이 올라간 작품들 안에서 완전히 새롭고 신박한 콘셉트를 찾는 것”이다. 그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콘셉트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굳이 내 작품 하나를 더할 이유가 없다”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인의 재미’, 입맛에 맞는 감이 딱 와야 작품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연출가식 농담이 툭 튀어나온다. “오페라 연출가는 모든 것을 조금씩 하지만,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죠. (웃음)”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합쳐 자기 걸로 해내야 하는 직업이다.
오페라 한 편엔 연출가 한 사람의 ‘인생의 총체’가 녹아든다. 연출가는 음악은 기본, 연기와 미술, 춤을 관장하고, 동시대와 호흡하는 사상가이자 철학가로 자리해야 한다. 시대가 공감할 트렌드를 제시하는 ‘힙스터’이자, 과거의 이야기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찾아 들려주는 통역가다.
요나 김 연출가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한 작품 안에 촘촘히 엮여 들어간다”며 “연출가가 축복받은 직업인 것은 내 안의 것들을 그림으로 다 풀어내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에선 연출가이자 작가인 요나 김의 사유와 관점, 미감이 투영, 견고한 세계가 구축된다. 그는 작품의 큰 틀을 세우는 것은 ‘직관적 감각’이라고 했다. 직관으로 쌓아 올린 세계는 집요하게 파고든 디테일로 직조한다. 가까이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디테일’은 무수한 연구와 팩트 체크의 과정을 거친다. 그 안엔 시대를 관통하는 인문학자의 시각과 해석이 씨실과 날실로 엮인다. 그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에서 미학, 문학, 철학을 공부했고 빈 국립대에서 같은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작업 과정에선 ‘이쯤하면 됐다’고 만족하는 법이 없다. 스스로도 자신의 집요함으로 “동료들을 그렇게 힘들게 한다”며 웃었다.
“이 일은 취미가 아닌 생업이에요. 그러니 일에 대한 윤리와 도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작품을 위한 철저한 준비, 집요한 디테일이 더해져야 숨도 안 쉬고 보는 흡인력이 나오게 되죠. 내 눈앞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관객이) 외면할 수 있을까요. 전 제 연출이 살아있는 존재라면 좋겠어요.”
요나 김의 작품은 오페라 본토인 유럽 무대의 현재를 보여준다.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영상을 활용하고, 그만의 해석을 입혀 현대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고전을 대하며 자신의 관점과 해석을 녹이지 않는 것은 게으른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창작자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요나 김 연출가는 “예술가는 언제나 질문으로 충만해야 하고,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아야 한다”며 “작품을 대할 때 나오는 질문을 억누르지 않고 던지며, 자기만의 대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질문을 하다 보면 과거와 같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다”고 강조한다.
‘탄호이저’ 역시 그간 한국 오페라 무대에선 볼 수 없었던 시각과 연출을 보여줬다. 서울 버전 무대는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세련된 공간 활용과 바그너의 이분법적 여성관, 사회와 개인 사이의 딜레마와 고민을 21세기의 시선으로 해석했다. 여성의 희생과 구원 서사는 보기 좋게 깨졌다. 이번 공연을 통해 그는 “한국 관객은 굉장히 직관적이고 세련됐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은 굉장히 큰 수확”이라고 했다.
“관객이 ‘이걸 과연 알아들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한 교만이에요. 관객은 이미 예술가들보다 앞서가고 있어요. 전 ‘최고의 관객’ 한 명을 상상하고 그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는 생각으로 연출을 해요. 관객의 시각을 지레짐작해 하향평준화한 무대를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의 최선으로 풀어내면 반드시 관객에게 도달하더라고요.”
유럽과 달리 국내에선 레지테아터(연출가가 시대와 배경 설정을 자유로이 바꿀 수 있는 연출가 중심의 무대) 오페라가 일반적 흐름은 아니다. 주어진 틀 안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 동시대 감각으로 고전의 고정관념을 뒤엎는 연출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요나 김 연출가의 무대는 때론 진취적이며 급진적이다. 어떤 때는 궁극의 미니멀리즘으로 시각 충격을 안긴다. 그도 경계를 고민한다. 도달할 수 있는 최고치의 파격과 실험도 생각해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되 지나치게 자의적이거나 임의적이지 않고, 사적인 즐거움을 채우지 않는 경계선은 어디일지 스스로 묻게 돼요. 내 존재와 생각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것, 내가 모르는 것,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주장해선 안되죠. 어떤 ‘척’을 하거나 ‘이럴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고, 오직 내 몸으로 체화하고 간파해 내 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저의 경계선입니다.”
그의 연출은 ‘고전 다시 쓰기’에 가깝다. 요나 김의 오페라 연출은 이제 우리 소리로 옮겨갔다. 그는 내년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가 공동제작하는 ‘심청’을 통해 처음으로 소리극에 도전한다. “21세기를 사는 한국 여자로서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 작품이다. 이미 여러 판본을 연구한 그는 독일어로 대본 작업까지 마쳤다.
판소리 대본과 소리꾼이 주인공이 된 이 무대는 ‘소리뮤직시어터(소리악극)’나 ‘소리뮤직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로 구상 중이다. ‘탄호이저’를 함께 한 요나 김 연출가의 독일 스태프들이 다시 한 번 협업한다. 2026년엔 유럽 공연도 추진한다.
요나 김 연출가는 “그리스 신화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없는 여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독일어로 ‘ohnmacht’, 영어로 ‘위드아웃 파워(without power)’로 불리는 사람이 바로 딸이고 심청”이라며 “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희생된 익명의 아이들, 무수히 많은 심청이 몇 백년의 억압의 역사 속에 존재했다”고 말했다.
그가 그리는 ‘심청’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심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시간대를 다시 배치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팔려가는 인신공양 스토리와 작품 곳곳에서 녹아든 유교적 가치관에 저항한다. 작품에서 ‘심청’은 딸이었으며, 힘을 가지지 못한 이 땅의 모든 이들의 대표자를 상징한다.
“어쩌면 우린 거대한 딸들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유럽에서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의 덕분이죠. 저 역시 많은 심청의 무덤을 타고 내려온 거예요.”
무수히 많은 오페라를 비롯해 ‘심청’에 이르기까지 요나 김 연출가의 작품엔 언제나 ‘인간의 이야기’다. 이중잣대로 규정된 사회, 모순과 위선의 사회, 강요된 관습과 통념에 대한 저항, 그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사회와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저의 주제이자 숙제예요. 저의 무대엔 ‘인간 사회와 인간 조건’에 대한 질문이 항상 있어요. 예술가들은 늘 약자를 대변해야 하고, 그들이 가지지 못하는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전 언제나 약자의 곁에 있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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