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운의 사색(史色)] 인간 심연의 그림자 … 한없이 초라한 존재를 응시하다
변신·소송 등 걸작 이면에
불운했던 가족관계가 보여
아버지에게 늘 짓눌리는 등
한결같이 욕망을 부정 당해
연인과 사랑이 힘들어질 땐
매춘부 찾아 감정 없는 관계
소심하고 자기 비하적인 탓
죽기 전엔 작품 소각 부탁도
2차대전후 인간회의론 일며
가려져 있던 작품성 재평가
한국 첫 노벨문학상 안겨준
한강의 작품세계와 이어져
◆ 매경 포커스 ◆
무료한 하루, 욕망이 다시 얼굴을 들이밉니다. 살갗을 만지고, 숨결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는 홀연히 다시 사내를 찾아옵니다. 그에겐 그러나 적당한 파트너가 없었습니다. 매춘부의 집을 찾은 그가 물었습니다. "여자가 있습니까." "하나 남은 여자가 있는데 나이가 조금…." 남자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합니다. "누구라도 좋습니다."
감정이 휘발된, 기계적 육체의 몸놀림만이 방 안을 메웁니다. 본능에 충실한 움직임, 침대에서 울리는 삐거덕 소리.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남자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서둘러 방에서 빠져나옵니다.
"괜한 짓이었군. 더러운 기분만 가득해."
충족된 욕망은 도르래처럼 내면의 허무를 길어 올립니다. 잠깐의 욕구를 이기지 못해 돈을 주고 나이 든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죄책감. 하지만 괴로움이란 감정은 유효기간이 짧기 마련이어서 며칠 후 사내의 마음속은 다시 육체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합니다. 발걸음은 매춘부의 집을 향합니다. 욕망, 허무 그리고 죄책감을 시계추처럼 오간 이 남자의 이름은 프란츠 카프카. 불합리한 세상과 그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개인을 그려낸 작가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대문호이기도 했습니다. 기존 이야기꾼의 권선징악 서사 구조를 부수고, 내면의 어두움을 마주한 덕분이었습니다. 문학적 영토를 넓힌 기념비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오늘 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올해는 그가 타계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폭군
"사내새끼가, 우물쭈물 뭐 하는 거냐."
카프카. 체코 프라하에 터를 잡은 아시케나지(히브리어로 독일계라는 뜻)-유대인 집안. 오랜 세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기에 이곳의 터줏대감들은 독일어를 쓰곤 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건 고된 일인지라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은 억세고 거친 사나이여야만 했습니다. 타향에서 여섯 식솔을 부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큰 덩치에 권위적인 인물이었던 헤르만은 아들 카프카가 썩 맘에 들지 않습니다. 식탁에서는 깨작깨작, 묻는 소리에는 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소심하고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아들이 성에 찰 리 없었지요. 그는 언제나 아들 카프카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버지는 공포와 혐오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카프카의 욕망은 늘 가족에 의해 부정당했습니다. 성적인 억압도 따라왔지요.
소녀를 만나 미소를 짓기만 해도 아버지는 언제나 엄한 표정이었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나이, 성적·정서적 결핍은 그 생채기를 진하게 남기기 마련입니다. 그가 점점 내면의 깊은 굴로 향했던 이유였습니다. 작은 일에 전전긍긍하고, 모든 일을 제 탓으로 돌리는 자기 비하적인 성격. 언제나 방에 틀어박혀 책 읽기에만 몰두했던 소년이 카프카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 헤르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헤르만은 몰랐을 겁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 가깝지 못하다면, 세상 그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다는걸.
보험사에서 그가 마주한 것들
"아버지가 처음으로 기뻐한 날."
카프카가 프라하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을 때, 헤르만은 처음으로 아들에게 미소를 지어줍니다. 헤르만이 원하는 진로여서였습니다. 카프카의 관심은 그러나 법학에 있지 않았습니다. 문학, 미술, 독서 활동이 그의 유일한 낙. 이곳에서는 인생 친구 막스 브로드를 만났습니다. 평생의 친구이자 프란츠 카프카를 세상으로 끌어낸 인물입니다. 내성적인 카프카에게 언제나 귀를 기울여준 친구였지요. 두 사람은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괴테를 읽으며 밤이 새도록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글쟁이' 카프카의 면모가 조금씩 고개를 들었지요.
1907년 23세에 대학을 졸업한 카프카는 노동자 재해 보험 연구소에서 직장을 찾았습니다. 노동자 상해에 관한 보상을 조사하고 평가하는 것이었지요. 손가락이 잘리고, 사지가 절단된 노동자에게 보험금 지급을 결정하는 일. 끔찍한 장면을 매일같이 목도해야 하는 일. 세상이라는 도끼가 인간의 신체에 남긴 상흔을 기록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어슴푸레 해가 지면 그는 자신의 동굴로 들어갑니다. 낮에 본 끔찍한 장면과 어릴 적부터 키워온 내면의 불안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이따금 외로움이 고개를 들 때면 그는 매음굴로 향했습니다. 돈만 내면 누구에게나 자기 몸을 내어주던 곳. 그가 감정의 교류 없이 쾌락을 느낄 수 있었던 장소였지요.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적 억압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에게 자괴감을 남겼지만,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면 그는 또다시 매춘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사랑 앞에서도 어두웠던 인생
"내 사촌 동생을 만나보겠어?"
둘도 없는 친구 막스 브로드가 어느 날 카프카를 불렀습니다. 그곳에는 그의 사촌 동생 펠리체 바우어가 있었습니다. 주걱턱에 다소 앙상한 얼굴.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매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지요. 격렬한 감정은 문학이라는 불꽃을 피우는 장작입니다.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완성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연인 펠리체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나는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어. 나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어." '소송'(Der Prozess), '변신'(Die Verwandlung), '아메리카'가 모두 이때 쓰인 책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에서 괴물 같은 해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소설 '변신' 중)
사랑에 빠진 남자의 저작은 예상과는 달리 자기 혐오와 비하 그리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득합니다. 불현듯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변신'만 해도 그렇습니다. 심연 속에서 카프카는 자신을 기생충으로, 쓸모없는 사람으로, 사회의 갈고리에 가까스로 매달린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에겐 억압적 사회를 향해 돌팔매질할 배포 따위도 없습니다. 사회가 누르는 압에 그저 질식하며 신음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소송'에서도 분위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주인공 요제프K는 어느 날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수사 당국에 의해 체포됩니다. 알지도, 알 수도 없는 법을 근거로 유죄 판결을 받아 든 채 비극적 결말을 맞이합니다. 치열한 법 논리 싸움도, 스릴 넘치는 탈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윽박지름에 순응할 수밖에 없던 카프카는 그의 문학을 무채색으로 칠했습니다.
가장 찬란해야 할 사랑조차도 그의 삶 속에서는 채도가 낮았습니다. 펠리체와 5년 동안 만나면서도 그는 약혼과 파혼을 반복합니다. 사랑하는 여인과 나신(裸身)으로 있을 때조차 그의 마음속에는 환희와 벅참이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욕망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별, 관계의 파멸을 먼저 떠올리며 불안해했었지요. 그가 펠리체와 연인관계에 있으면서도, 매춘부를 찾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감정의 전기가 일절 통하지 않는 부도체적인 관계 속에서만 그는 욕망을 풀 수 있었던 셈이지요. 카프카의 작품 속 섹슈얼리티는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합니다.
작품의 분서(焚書)를 요구하다
"다 태워버리게."
1924년 40세 나이, 폐결핵으로 죽음의 문턱 앞에 섰을 때조차 그는 '자기혐오'에 차 있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카프카가 영혼의 단짝 막스 브로드를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막스,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일기, 원고, 스케치. 제가 남긴 모든 것을 읽지 말고 불태워주십시오." 자신의 책을 분서(焚書)해달라는 친구의 마지막 부탁. 막스 브로드는 "알겠다"고 답했지만,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카프카의 '친구' 대신 '독자'로 남고자 한 선택이었습니다.
"책은 내면의 세상을 깨는 도끼여야만 해." 카프카는 언젠가 이야기했습니다. 책이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 도구라는 뜻에서가 아니었습니다. 내면 깊숙한 빙벽(氷壁)에서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감정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카프카라는 도끼가 있었기에 우리는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 혼란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끔찍한 상흔(그의 세 여동생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습니다) 이후, 카프카는 이론의 여지없는 세계적 대문호가 되었지요. 유대인 학살, 냉전, 잇달은 전쟁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했습니까.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 잠자와 우리는 얼마나 달랐습니까.
그가 죽은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올해, 대한민국은 '한강'이라는 '도끼'를 갖게 됐습니다. 소외당한 자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지만, 주제는 서슬 퍼런 쇠붙이와 같습니다. 세계 문학계가 그녀를 '한국의 카프카'라고 호명하는 배경입니다. 그가 깨어 부순 빙벽은 온화한 문학의 바다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을 유영하며 인간의 존재를 사유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문학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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