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만만한 노동이 어디 있으랴 [노동의 표정]
8편 한주리 작가의 「만리동 이발소」
3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성우이용원’
이곳 지키는 한명의 이발사 노동자
오랜 시간 견뎌낸 이발사 두꺼운 손
사라져가는 노동 새롭게 생긴 노동
공간과 도구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직업 '이발사'. 누군가는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부러워할지 모른다. 마치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으면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시대를 꼬집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만만한 노동이 어디 있으랴. 노동의 결을 모두 알 순 없겠지만,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섬세한 사연이 있다.
최근에 알게 된 지인들과 좌담하기 위해 파주에 있는 동네 서점인 '쩜오책방'에 방문했다.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터라 서점 구경도 할 겸, 그곳에 전시된 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동네 서점의 경우, 서점을 지키는 서점지기의 성향에 따라 책의 종류와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 서점만이 품고 있는 표정을 탐닉하고 싶었다. 대형서점과는 변별된 개성(차이)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책 한권을 집었다. 그것은 삽화가(illustrator)인 한주리 작가의 「만리동 이발소(소동·2023년)」였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발소'를 다룬 이야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요즘은 사라져 가는 이발소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살결을 다룬다. "이발소 단골이었던 사람들/한때 이곳을 지나쳐 간 사람들/수십 년 동안 이발소를 찾아왔던/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림과 에세이로 펼쳐진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이발소가 소재였던 탓에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방문한 이발소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몽상하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35년 전으로 돌아가 그 당시 이발소 문을 아버지와 함께 다시 열어젖힌 것이다. 딸랑!
커다란 가죽 의자에 작은 몸과 발을 뉘었던 일, 이발사 아저씨가 바리캉으로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주던 일, 귀밑이나 뒷머리를 정리하려는 목적으로 비누 거품(?)을 풍성하게 발라주던 일, 이발이 끝나고 난 후 머리 감는 곳에 앉아 있으면 따뜻한 물로 깨끗이 씻겨주던 일, 이 과정에서 아저씨의 두꺼운 손을 느꼈던 일, 아버지가 이발사 아저씨에게 내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달라고 나 몰래 부탁한 일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이 작품에서 소재로 다뤄진 이발소는 서울역 뒤편 배문중고등학교 주변에 자리한 '만리동'에 있는 '성우이용원'이다. 이곳은 3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곳으로 1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긴 시간의 역사만큼 다양한 사람과 사연을 품고 있는 곳이다. 2019년에 안전상의 문제로 리모델링되기도 했지만, 현재도 여전히 운영 중이며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런 역사성보다도 이곳을 지키는 한명의 이발사 노동자에게 관심을 가져보려고 한다. 다양한 노동의 형태 중 하나를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으니 말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곳은 대를 이으며 이발소를 운영하는 곳이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이발사였던 탓에 현재 이발소를 운영하는 이발사는 청년 시절부터 이발 기술을 배웠다.
"열아홉살 무렵, 처음 이발 일을 배울 때는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일하기 싫어 몰래 도망도 쳤습니다. 하지만 운명이었을까요. 일이 손에 익으니 재미도 있고 점점 욕심도 생겼습니다. 노력하며 성실하게 기술을 닦았습니다(52~53쪽)."
열아홉살 때부터 기술을 배웠던 이발사는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해 방황했다. 하지만 점차 이발소 일이 손에 익어가자 재미를 느꼈고, 더 잘하기 위해 욕심이 나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열아홉에 시작한 이발사 일은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텍스트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이발소를 운영하며 손님과의 갈등도 있었을 테고, 자유롭게 떠나고 싶어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공간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그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 공간 유지를 위해 힘든 일도 있었을 것이다.
이발사는 "건강이 허락한다면, 여기서 오래도록 이발사 일을 하고 싶다"고 소망한다. 하지만 "손톱 아래 갈라진 틈"은 어쩔 수 없다. 그의 아버지처럼 나이가 들었다는 이야기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노동하지 못함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어떤 이들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프지 않고 건강을 지속하겠지만, 어떤 이들은 녹슨 몸을 품고 있어서 활동이 쉽지 않다.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줘야 할 때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텍스트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오랜 시간을 견뎌낸 이발사의 두껍고 갈라진 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공간을 지키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구름처럼 자유롭게 떠돌지 못하고 한 그루의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기쁨과 쓸쓸함이 동시에 교차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손님이 늘 그를 찾으니, 이발사의 쓸모는 쉴 틈이 없다. 물론, 이런 시간의 진폭이 외롭고 고독하게만 채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 이 공간에 머문 사람들과/한때 이곳을 지나쳐 간 사람들./수십년 동안/이발소를 찾아오고 머물렀던/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켜켜이 쌓아 올린 세월이/고스란히 녹아든 이발소의 하루"는 고된 노동이라기보다는 행복한 일상이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발사는 '공간'과 '도구'만 있다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런 노동도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이발사의 노동은 이발사의 노동대로 힘든 속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노동의 결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말할 수 없는 섬세한 사연을 숨겨 놓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성우이용원'을 이용했던 사람들은 그 공간에 이발소가 여전히 있으니 추억을 도난당할 필요가 없겠다. 하지만 이발소는 이제 거의 종적을 감췄다. 어린 시절 내가 다니던 인천 송현성당 근처 '태양이발관'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재개발 탓인지, 운영상의 문제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는 이발소가 아닌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잘랐던 탓에 간혹 지나가다가 멀리서 이발소를 바라보면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런 상상은 쉽게 켜지지 않았다.
시야에서 사라지니 기억에서도 점차 흐려진다. 하지만 한주리 작가의 「만리동 이발소」를 읽고 나니 여러 상념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이발사의 '노동'이 숨어 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사라져가는 노동도 새롭게 생겨나는 노동도 있다. 수많은 노동 중에 이발사의 노동도 그렇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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