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센트도 쓸 필요 없다”···K반도체 덮친 불확실성[트럼프 2기]
“반도체과학법(칩스법)은 정말 나쁜 거래에요. 우리는 부유한 회사들이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세우도록 수십억 달러를 지원했지만, 그들은 좋은 공장들은 주지도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10센트도 쓸 필요가 없어요. 관세만 높게 매기면 그들은 자발적으로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세울 겁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의 유명 유튜브 채널 ‘조 로건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했던 이 말은 반도체 산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대만 등 반도체 제조 국가들이 미국 땅에 공장을 짓게 하지만 보조금(당근)이 아닌 관세(채찍)라는 수단을 쓰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으로 국내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 산업에 불확실성이 휘몰아치고 있다. 관세 부과는 물론 조 바이든 정부가 칩스법을 통해 약속한 각종 보조금도 축소·철회될 가능성이 생겼다.
바이든 정부가 2022년부터 가동한 칩스법은 미국에 반도체 제조 시설을 건설·확장하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게 골자다. 삼성전자는 2026년 가동을 목표로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달러(약 23조5000억원)를 들여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보조금 총 64억달러를 지급하기로 약속한 상태다. SK하이닉스도 인디애나주에 후공정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데 38억7000만달러(약 5조2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트럼프 2기 정부가 칩스법을 폐기하거나 보조금 규모를 축소한다면 미국 공장 건설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반도체 기업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만 TSMC는 중국 고객사에게 7나노미터(㎚) 이하 인공지능(AI) 칩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트럼프 당선인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선제 조치로 풀이된다. 그는 줄곧 “대만이 미국 반도체를 도둑질하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바이든 정부는 임기 내 칩스법 지원금을 마무리 짓기 위해 삼성전자 등과 합의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7일 “삼성전자와 인텔·마이크론 등은 (칩스법)계약과 관련해 일부 주요한 세부 사항을 처리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트럼프 2기 정부가 실제로 보조금을 축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칩스법이 사실상 트럼프 1기 정부에서 추진된 것을 고려하면 아예 뒤엎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해당 법으로 가장 큰 수혜가 예고된 기업은 85억달러를 받기로 한 인텔 등 미국 기업들이다. 김정회 반도체협회 부회장은 “만약 칩스법 보조금을 (트럼프 2기 정부에서) 완전히 못 받게 된다면 미국 기업들도 상당한 피해를 보게 되고 투자 유인도 줄어들기 때문에 이 같은 요인을 감안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관세 부과는 우려 요인이다. 최근 1년간 AI 붐 덕분에 미국 빅테크 업계에서 한국산 고성능 메모리의 몸값이 높아지면서 대미 반도체 수출액이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이는 트럼프 당선인이 경계하는 ‘미국 무역수지 적자’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현재 한국 반도체 제품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관세가 면제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안보나 불공정 무역을 이유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301조를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2기 정부의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견제는 더욱 강력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게는 양날의 검이다. 우선 중국 내 공장을 보유한 한국 기업들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에 반도체 첨단장비 반입을 제한하면서도, 한국 기업들만큼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제외한 대부분 장비를 반입할 수 있도록 ‘검증된 최종사용자’(VEU)로 지정해 줬다. 반면 트럼프 2기 정부에서는 VEU 지정이 취소될 가능성이 높아 공장 운영에 차질이 예상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트럼프 2.0 행정부의 경제정책 전망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는 과정에서 동맹국의 협조를 구하는 단계가 생략될 위험이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수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쑤저우에, SK하이닉스는 우시·다롄·충칭에 공장을 운영 중이다. 삼성전자는 전체 낸드 생산량의 28%를, SK하이닉스는 전체 D램의 40%를 중국에서 생산한다. 이들 제품이 중국산으로 분류돼 미국 수출 시 관세 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중국 모바일·PC 제조기업들도 한국산 메모리를 상당수 구입해서 쓰는데, 이들 제품이 미국 관세장벽에 부딪히게 되면 메모리 반도체를 비롯한 정보기술(IT) 제품의 수요가 전반적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반면 중국 견제에 따른 반사이익도 기대된다.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과거 트럼프 1기 정부 시절 중국을 세게 때리면서 우리 반도체를 비롯한 주요 전략 산업들이 중국 기업들보다 반 박자 정도 앞서 나갈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국내 기업이 곤란을 겪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중국의 거센 추격을 뿌리칠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최근에는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같은 중국 메모리 기업들의 약진으로 삼성전자가 레거시(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매출 타격을 입는 등 중국 기업들의 존재감을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강력한 대중 수출·투자 통제로 중국의 첨단 반도체 성장이 지체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반사이익은 기회 요인”이라고 말했다.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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